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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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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꿈


BY my꽃뜨락 2001-09-01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라, 이번 여름은 정말로 죽을 번 했다.
삼복더위에 혀 빼문 강아지 모양, 찌는듯한 폭염에 헥헥대던 것은
그렇다치고 그보다 나를 못살게 했던 진짜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
프지 않을 내 아들놈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시골에 있는 대안학교에 집어넣은 탓에 기숙사
생활을 했던 아들놈을 보는 것은 주말에 한번이 고작이었다. 그러
니 모처럼 얼굴 맞대는 모자지간이 다정스러울 수 밖에...

얼굴만 보면 우리 이쁜 아들, 이쁜 아들 하며 궁둥이 툭툭 쳐주던
자상한 엄마노릇을 아낌없이 보여 줬는데, 웬걸 아들이 돌아오자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원래 글자라고 생긴 것엔 도통 관심이 없
는 놈이라 차분히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

밤새 컴퓨터 앞에 달라 붙어 게임을 하던가, 채팅을 하며 시간을
죽이다 새벽녘에 잠들어 기상시간이 보통 오후 1시였다. 자는 놈
두둘겨 깨워 억지로 밥상 앞에 앉히면 비몽사몽 밥 한 그릇 입 안
에 쑤셔넣고는 부리나케 TV 앞으로 향한다.

힙합에 빠져 춤바람이 난 아들놈이 녹화해 둔 공연테잎을 보며 춤
연습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화면에 나타난 동작을 유심히 관찰하다
그 동작 그대로 따라하기 시작한다. 머리 처박고 뱅글뱅글, 손바닥
짚고 또 한바탕 몸둥이를 돌린다. 휘휘 도는 게 팽이가 따로 없다.

그렇게 한바탕 춤을 추고는 저녘을 먹고 잠시 컴퓨터, 곧이어 어
둑어둑해지면 가방 하나 짊어지고 건들건들 집을 나선다. 시내에
춤연습장을 갖고 있는 춤 동호회에 합류하기 위해서다. 이 짓을 하
루도 빼지 않고 반복하니 어느 부모가 뺑 돌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성적표가 날라 왔다. 애초에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성적표를 본 순간 기도 안찼다. 거의 전교 꼴찌에 가까운 수준이
었다. 성적표를 가로 진탕 도배를 하다 중간에 수가 세개 튀어 나
왔다. 체육, 컴퓨터, 에니메이션... 맨 끝 선생님 종합평가가 눈
물겹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는 최선을 다 하고, 집중력이 뛰어남!
할 수 없이 깔깔 웃어 버렸다. 강아지를 무지 좋아하는 아들은
꿈이 수의사였다. 수의사가 되어 그 좋아하는 동물들을 평생 끼
고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 부모치고 "사"자에 껌뻑 죽지 않
는 사람 얼마 있을라구. 수의사도 의사 범주에 들어가거늘, 남편
과 나는 대찬성이었다.

밤늦게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온 아들놈에게 성적표를 내밀었다.
학교에서 봤어요. 주눅 든 표정 하나 없이 아주 뻔뻔스럽게 성
적표를 다시 내게 내민다. 아들, 너 수의사 되고 싶다 했지? 그
런데 수의대를 가려면 이과를 선택해야 되는데, 공통수학 20점으
로 수의대 가겠니?

목소리도 부드럽게 아들놈을 살살 구슬렀다. 엄마,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겠어요. 그런 대답을 기대하며. 그런데 돌아온 대
답, 참 그렇구나. 엄마 나는 수학책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러니 수의대는 못가겠네...

그럼 우짤래? 아, 방법이 있어요. 애견 미용사 하면 되겠네요.
꽈당! 이 한방으로 나는 아들놈에게 K.O 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놈아, 의사는 못할 망정 미용사가 뭐냐? 직업의 귀천을 따지
는 것은 천박한 인간들이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시
켰던 나는 차마 이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

그래, 애견 미용사는 대학이 필요 없겠구나. 그럼 직업은 결정
되었네. 아들이 서너살 되었을 때였을까? 고단한 직장생활 때
문에 나는 어린 아들놈을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는 주말에나 가서
보던 때였다. 어려서부터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개구장이 아
들놈이었는데 하루는 할머니 보고 이렇게 말하더란다.

할머니,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 내가 이 담에 커서 공 차서
돈 많이 벌어 저 방에 가득 쌓아 놀테니까 할머니가 그 돈 다
써. 할머니 죽으면 내가 번 돈 쓰지 못하잖아. 외손주새끼를 봐
주느니 방아깨비를 업어 준다는 옛말도 있지만, 쥐씨알만한 외손
주새끼의 할머니 사랑에 엄마는 목이 메었다.

그러더니 한두해 더 커서는 그 꿈이 시내버스 운전사로 바뀌었
다. 한참 장난감 자동차에 빠져 놀던 시기였다. 엄마, 나는 커서
시내버스 운전사가 될거야. 안양과 철산동 왔다갔다 하는 시내버
스 운전해 할머니, 엄마 공짜로 태워 줄거야...그 때 나는 아들
놈에게 말했다. 인장아, 이왕이면 좌석버스 운전사가 되거라. 시
내버스는 에어콘도 안나오고 후졌거든...

그 에미에 그 아들이라고, 아들 꿈이 바뀔 때마다 그 수준으로
맞장구를 친다. 이런 에미를 보고 있는 남편은 말도 못하고 웬간
히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하루는 정색을 하고 내게 주문을 했다.
당신, 인장이하고 얘기할 때 너무 생각없이 가볍게 던지는 것 같
아. 아들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고 깊이있게 토론을 한 뒤, 그
꿈을 이루는 방법을 같이 ?는 것이 부모 도리가 아닐까?

여보, 자식 이기는 부모 있답디까? 지 놈이 좋아하는 일을 하
며 살아야지. 부모 마음대로 억지로 되간? 당신도 강아지는 되
게 좋아하니 잘 됐다. 애견센타 하며 아들은 털 깎고, 아빠는
목욕시키고, 그러면 되겠네? 깔깔깔~~~~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