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짧은 침묵을 내목에 걸려 있던 침이 꼴각 소리를 내며 깨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표정를 유심히 살피시던 아버지의 얼굴에 "한마디로 어이가 없다!"
그리고 "황당한 일인지고!" "이놈들을 어찌 해야 하나?" 등등이 써있었습니다.
어머님은 부엌에서 무엇을 하시는지 우리들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안타까운 상황은 계속되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아버지 한테 맞아 죽던지 살던지 상관하지 않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니 무정한 모정이 원망스러웠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잘못하였는지는 알겠지?"
"네.....!?"
물론 잘 알고 있었습니다. 회초리로 백대를 맞아 종아리가 터저도 할말은 없지요.
하지만 이 어린 양을 가엽게 보시고 넓으신 아량으로 선처만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둘이 일어나서 옷을 다 벗어라!"
"............??"
"어서! 팬티만 남기고 다 벗어!"
몸에 때가 끼어도 목간을 시키 주실 분도 아닌데 왜 옷은 벗으라고 하시나?
그리고 가마솥에 목욕물도 데워 놓지 않았는데 왜 옷을 벗어야 하지?...
우리는 너무나 궁굼해 하면서도 아버지의 얼굴조차 쳐다 볼 수가 없었었습니다.
자식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는 그날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이말 한마디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 봐도 그때 우리는 너무나 많이 떨고 있었나 봅니다.
"형! 우리 그때 많이 떨었지?"
형은 대답이 없습니다. 지금 내곁에 없으니 그렇겠지요.
하지만 형이 내곁에 있다면 하나도 떨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둘이는 이제부터 동네 한바퀴를 돌아 오너라!"
"네?.....!!"
"빨리 나가지 않고 뭐해! 집에서 보면 느그들이 동네 한바퀴를 도는지 다
보이니까 확실히 돌고 와야 한다!"
군대 용어로 그것은 빰바라였습니다.
그것도 진눈개비가 함박눈으로 변해 온 마을을 하얗게 덮고 있었고 바람은
성난 고양이처럼 으르렁 대고 있는데 맨몸에 까만 고무신을 신고 동네 한바퀴를
돌아야 한다니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였습니다.
방문에 붙어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힐끗 밖을 보니 찬바람과 눈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마 밑에선 쪽팔림과 부끄러움이 우리를 비웃고 있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쪽팔림의 원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습니다.
노여움이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을 한번 애처롭게 바라 보지도 못한 채 우리
형제는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왔습니다.
눈과 바람이 송곳처럼 온몸을 찔러댔습니다. 흡사 친구를 만나 장난이라도
치려는 듯이...나쁜 눈바람 같으니라구....
알몸의 우리가 반가워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었고 턱은 움직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떨렸습니다.
머뭇거리다 보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아버지의 큰소리가 두려워
우리는 엉금엉금 마당으로 내려 왔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더니 어이가 없는 듯 약간의 미소와 걱정을
하시더군요.
그래도 어머님은 아버지와 좀 달랐습니다.
약간의 애처러운 표정을 지으셨으니까요. 아까와는 달리 조금의 모정은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미끄러 지지 말고 조심해서 돌아라!"
약을 올리는 것인지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분간이 되질 않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동네 사람들이 집앞 골목길을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참 동안을 처마 밑에서 떨며 서성이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면 각개 약진을
하자고 형이 제안을 하더군요.
나는 형이 뛰어 갈 동안 뒤에서 엄호하고 내가 뛰어 형 앞으로 전진하면 형은
나를 엄호하는 식이였습니다.
군대의 각개 약진 훈련이나 다를 바가 없었지요. 머리도 좋았지요.
그렇게 하지 않다가 혹 동네 여자 친구라도 마주치면 우리는 그날 부로 우리들의
인생은 끝나는 거였기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였습니다.
한참 동안을 그렇게 동네를 돌고 있는데 생각지도 않는 이웃집 여자 친구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