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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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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은 지켰다구


BY 솔바람 2001-01-28

영아는 점점 움츠러들고 있었다.
11시가 벌써 지나고 12시가 되어가고 있는 데 어찌된 셈일까?
아직 남편한테서는 전화 한통도 없는 것이었다.
늦더래도 제발 약속만 지켜 주었으면....
사무실로 전화를 해볼까?

마음이야 벌써 다이얼을 돌리고도 남았지만 만약에 남편이 이미 퇴근을 했다면?
요즘 들어 무슨 설계 때문인가 더욱 바쁘다고 했는데, 상사가 함께 있거나 너무 일이 바빠서 전화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제 전근된 지 3개월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다른 직원들에게 극성스러운 마누라 때문에 힘들겠다고 찍히기라도 하면?

늘 남편에게 핀잔을 당하곤 하면서도 매주나마 빠짐없이 애청하곤 하는 드라마에선, 평소 영아가 좋아하던 남자 배우가 여자와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이 장면 저 장면을 건성건성 보고있던 영아는 탁 소리가 나도록 스위치를 꺼버리고 고개를 무릎에 푹 파묻었다.
오늘의 약속은 꼭 지키게 해야만 돼.
그이에 대한 나의 기대가 가망성을 잃고 흔들리는 건 물론이고, 그이는 이제 앞으로도 더욱 약속을 안 지키게 될 거야.

어젯밤, 영아는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온 남편의 탁 풀린 눈동자에 가슴이 철렁했는데, 남편은 웩웩 구역질을 마구 해대는 것이었다. 더 나빠진 건가?
지난 신정 연휴에 벼르고 별러 남편이 종합진단을 받도록 했었는데, 디스토마 때문에 간장이 나빠졌으니 술, 담배 조심하라는 의사의 경고를 듣고도 "술, 담배 안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냐? 내 자신은 내가 잘 아니 걱정 마시게" 하며, 영아의 금연, 금주 권고에 귀도 기울이지 않던 남편이었다.

한참 구역질을 하던 남편이 눈물이 글썽해서 양치질을 끝내고 영아가 건네주는 꿀물 그릇을 받으려다 앵도라진 영아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여보, 미안해. 미안해. 가끔 그럴 수도 있지 뭐. 괜찮아, 신경 쓰지 말어."하고 아직도 온전치 못한 발음을 하며, 영아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영아는 이치저치 속이 상한 데다 멀리계신 친정 부모님과 동생들이 더욱 보고싶어져서 그만 코를 훌쩍이고 말았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려고 한참 애를 쓰던 남편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찾아 연거푸 서너대 피워대더니, 비어버린 담배 갑을 구겨대며 입맛을 쩝쩝 다셨다.

아침이 되어서도 매정한 태도를 풀지 않는 영아에게 아침상을 받은 남편이 수저도 들지 않고 우울한 표정으로 "여보, 이젠 정말 술 안 먹을게" 했다.
출근할 남편에게 좀 미안감을 느끼고 있던 영아가 픽 웃으며,
"정말이예요?" 하니까 남편은
"응, 정말!"하며, 과장되게 고개를 뜨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선 오늘 하루만 술하고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하세요."
술은 가끔 마시더래도 이 기회에 담배만은 끊게 해야겠다는 영아의 속셈을 내심 눈치챈 것인지, 영아가 기분을 푼 것만이 안심스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까지, 으응, 그래 좋아."하며, 남편은 영아의 새끼손가락에 자기의 손가락을 걸고서 신나게 흔들어 댔다.

요즘 들어 매일 늦긴 했었지만, 늘 잊지 않던 전화마저 오늘은 잠잠했다.
오늘도 술을 마시고 온다면 정말 참을 수 없어.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는 거야.
참는 게 능사가 아닐 거야.

처녀시절, 사무실을 매일 안개 속처럼 만들곤 하던 남자 사원들에게 질려 한 겨울에도 일부러 바락바락 창문을 열곤 하던 영아가 절대로 담배 안피는 남자에게 시집갈거야 하고 얼마나 이를 갈았던지 골초 장상도씨는 늘 비아냥거렸다.
"미스강, 그러면 더욱 골초에게 시집가게 된다구. 두고 보라니까."
아, 정말 장상도씨의 악담이 들어맞을려고 그랬나?
왜 지금의 남편이 데이트 할 때마다, 음식점이나 찻집에서 영아의 양해도 없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도 그냥 넘어갔었던 걸까.
시계가 열 두 번을 치고 있는 동안, 영아의 마음은 더욱 씁쓸해지고 약이 올랐다.

그러고서도 얼마가 지났을까?
옹송거리고 앉아 깜빡 잠이 든 영아가 화들짝 눈을 떴을 때,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 주머니에서 더듬거리며 담배를 찾아 문 남편이 영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여보야, 사랑해. 난 오늘 참 기분이 좋다. 직원들 술자리에서 말야. 당신은 바가지 긁을 줄 모르는 이해심 많은 여자라구 자랑을 하고 왔지. 그럼.
....응 약속? 약속은 지켰지. 봐, 벌써 3시가 넘었잖아?
그러니까 난 하룻동안 금주, 금연을 한 거지.
약속은 지킨거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