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하나, 아들 하나,
그렇게 손이 귀한 집안 3대독자로 태어난 우리아버지는 고을에서 알아주는 수재였다고 한다.
내가 어릴적에 다락방에서 놀다가 찾아낸 수십년 간직한 아버지의 학용품 더미 속에서
나온 성적표는 그야말로 후덜덜했다.
창가(음악)에서 99점을 맞은 것을 제외하곤 모든 과목이 해마다 올백!
30리길을 날마나 뛰어서 등하교를 했다는데 어쩜 저런 성적표를 받을 수 있었는지?
6.25전쟁이 끝나고 뒤늦게 입학을 해서 그런지 그렇게 공부가 재밌었다고 한다.
공부하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하며 농사일만 거들라고 야단치던 할아버지 눈을 피해
몰래몰래 공부를 하셨다는데도.
그래도 아버지는 우리 듣는 데서 한번도 당신 자랑을 안 하셨다.
너희도 잘 해야 한다 뭐 이런 주문도 한번도 안 하셨다.
다만 고모나 다른 동창분들에게서 아버지의 전설을 전해들었을 뿐이다.
나는 이런 부분에서 우리 아버지를 참 존경한다.
그저 그 힘든 농사일 중에도 틈틈이 우리 공부를 직접 가르쳐주셨고
밤에도 안 주무시고 늘 불 켜놓고 독서를 하든가, 한자공부를 하셨다.
엄마가 "아니 어떻게 된 게 우리집은 공부해야할 애들은 쿨쿨 자고
이제 어디다 쓰려고 아버지만 공부를 하냐"고 타박할 정도였다.ㅋ
관공서직원들보다도 어려운 한자를 잘 아셔서
동네분들 서류작성 같은 것도 도맡아 하셨다.
(우리 어릴 적만 해도 한자를 많이 썼으므로 관공서 서류제출 같은 게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중학교때는 한자옥편 찾기가 귀찮아서 아버지께 질문하면
부수적인 것까지 설명을 아주 자세히 해주시곤 했다.
가끔 우리가 종이를 아까지 않고 흥청망청 쓰다버리면
그런 걸로만 혼을 내셨다.
당신 어릴 적에는 종이가 없어서 누렇고 품질도 떨어지는 그런 종이에
연필로 한 번, 펜으로 한 번, 붓으로 한 번....그렇게 세번씩 써야 버리곤 했는데
이렇게 종이를 아끼지 않고 함부로 하느냐고...
고모의 말에 의하면 6학년때 선생님이 못 푼 어려운 수학문제를
어린 우리아버지가 푼 일화가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우리아버지는 수학,과학에 재능이 있어서 그야말로 요즘 태어났으면
과학영재로 대접받았을 만한 분이었는데(나는 이런 아버지를 안 닮았다는 게 함정ㅠ)
사범학교에 차석합격하고도 할아버지의 가업을 이으라는 강요에 진학을 못해서
평생 농사를 지으셔야했다.
그래도 농사를 지을 때 주먹구구식으로 안하고 늘 뭔가 기구를 개발하시고
좀 더 과학적이고 능률이 오르게 해얀다고 하면서
농기계를 직접 수리해가며 지금말로 하면 과학영농을 시도하셨던 것같다.
농부로서는 그래도 유명하게 지역잡지 같은 것에도 실리고 인터뷰도 가끔 하시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하셔서 사람들이 구경을 오던 기억이 난다.
한 번 산 농기계는 십년이 지나도 계속 수리를 해가며 쓰니
기계 영업하시는 분들이 왔다가 이 집처럼만 하면 우린 다 굶어죽겠다고 하던 기억도 난다.ㅋ
부지런과 절약의 대명사였던 아버지가 새로나온 가전제품은 동네에서 늘 첫번째로 사다
엄마에게 안겨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부러움을 사던 기억도 난다.
엄마도 늘 바쁜 농사일을 함께 하니까 살림할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주려고
그런 뜻도 있을테고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던 것도 같다.
곤로를 쓰다가 가스렌지가 나오고 전기밥솥이라는 게 새로 나오고 그런 소소한
우리나라 가전의 역사도 가물가물하게 기억이 난다.
평소 생전가야 잔소리도 없고 과묵하고 감정표현이 없는 아버지가
연세 지긋하셔서도 공부에 대한 아쉬움과 한으로 남몰래 눈물지으실 땐 정말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지극한 효자였음에도 공부 부분에서 만큼은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도
하셨다.
밥도 실컷 못 먹게 하는 그 잘난 농사를 이어받으라고 공부도 안 시켰다며...ㅠ
없는 집안 살림 일으켜가며 우리 남매들 공부시키느라고
밤에 잠도 안 주무시고 뼈가 빠지게 일을 하시느라고
당신에겐 평생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당신이 못 배운 한으로 우리는 대학, 아들인 동생은 대학원, 미국유학까지
하고싶은 만큼 끝까지 다 시키겠다고 하셨었는데
동생이 국내에서 연로하신 부모님 부양해얀다고 미국유학은 포기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너무 안됐어서 우리 대신 아버지가 학교엘 다니셨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었다.ㅋ
꼴지게짐을 사람이 안 보일 정도로 산더미처럼 지고 다니셔서
얼핏 보면 사람이 아니라 짐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같이 보일 정도였고
남들은 소 한 두마리를 데리고 논밭을 가는데 아버지는 앞뒤에 두마리씩 네마리를 끌고도
일을 잘 해내서 남들에게 초빙돼 아르바이트(?)까지 다니셨다
이젠 내집안 일도 넘치는데 뭐하러 남의 일까지 힘들게 하느냐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학교땐가 학교 끝나고 버스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저녁어스름녘에
우리아버지가 소를 네마리나 앞뒤로 끌고 남의집 일터에서 걸어서 돌아오고 계셨다.
지금도 생생한 그 장면을 떠올리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자식인 나는 편하게 버스타고 가는데 우리아버지는 하루종일 남의 집 일을 하고
십리길을 그렇게 걸어서....ㅠ
혼자몸도 아니고 큰 소들은 억세고 제멋대로여서 단속하기도 힘든데...
그렇게 번 돈으로 첫째인 우리언니의 엄청 큰 책상을 최고급으로 맞춰주셨다고 했다.
아버지도 어릴적 목수인 친척분이 선물로 앉은뱅이 책상을 짜주셨는데
너무 좋아서 그걸 어깨에 메고 단숨에 몇십리길을 달려왔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그렇게 하셨나보다.
-그 책상은 내가 물려받아서 시집 오기 전까지 썼었다.ㅎ왠지 그립다 그 낡은 책상이-
그런 아버지가 공치사 한 번 없이 우리를 키우셨으니 이 어찌 감사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내가 별로 뛰어날 것도 없는 성적표를 받아와도 아무말 없이 '다음에 더 열심히 해라'
좀 올랐으면 '잘 했다. 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해라' 하시거나
너무 갑자기 점수가 낮은 과목이 있으면 '교과서 갖고 와봐라' 하신 게 다였다.
내가 아버지 입장이었다면 저렇게 하긴 힘들었을 것같다.
그런 덕분인지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크면서 점점 더 나아진 편이다.
내대신 동생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수석' '차석' 타이틀도 달고 그랬으니
별로 내색은 안하셨지만 속으로 많이 기쁘셨을 것같다.
생전 자식자랑도 칭찬도 별로 없으셨던 분인데
우리 시부모님과의 상견례 뒤에 나몰래 '우리딸은 장학금 타며 공부했고 대학원도
가고싶어했는데 동생들 때문에 희생을 시켰다. 맏며느리로 시집 가서 고생하고
사는건 반댄데 그래도 지가 좋다니 보낸다. 가방 들고 학교만 다녀서
살림은 잘 모르니 잘 부탁드린다'고 은근히 압박성 자랑을 하셨다는 소릴
나중에 시어머니께 전해듣고 나혼자 웃었다.ㅋㅋ
공부하라고 날마다 들볶는 울엄마가 지겨워서 청개구리 짓을 하던 내가
대학가서야 비로소 철이 들어서 은혜를 갚아얀다는 생각에 좀 열심히 하긴 했지만
뭐 우리 아버지가 자랑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는데ㅋㅋㅋ
진작 좀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나는 왜 그렇게 늦된 아이였는지...ㅠ
지금도 후회막급이다.ㅠ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가끔 내 아버지의 스타일을 많이 닮은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야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한이 있으셨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공부를 안한 게
한이 돼서 지금도 늘 책을 손에 들고 있다. 뭔가 끊임없이 공부를 해야만 잘 살고 있는
것같고 안심이 된다.
이런 게 바로 아버지가 몸소 보이신 산교육의 결과가 아닌가싶다.
어느날인가는 수험서를 보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보던 딸이 물었다.
"엄마는 아직도 공부가 그렇게 재밌어?"
"왜? 너는 공부가 재미없어?"
"아니 엄마가 맨날 하도 열심히 하길래...재미있나 하고"
"사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별로 안 해서 그 때 안 한거 지금 하는거야
그리고 원래 공부는 평~생 하는거야"
"ㅎㅎㅎ"
나는 자식 앞에서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ㅋ
그리고 지금의 노력하는 내모습을 애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뭔가 바라고 원하는 게 있거나 짐스런 존재가
되었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아직도 바라기보다 뭔가 끊임없이 주려고만 하신다.
어떻게 저렇게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살림 불려가며 자식들 공부시켜가며 노후대책은 언제 그렇게 다 해놓으셨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아버지 먼저 돌아가시더라도 요양원엔 절대 안 가겠다는 엄마를 위한 후속대책까지
벌써 다 마련을 해놓고 당신이 돌아가시고 남은 재산이 있거든
똑같이 분배를 하라고, 아니 지금 몫을 지어놓자고 하셔서
우리는 너무 미안한 마음에 됐다고하고 다 도망왔다.ㅋ
연세가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걸 생각하기가 그렇다
그리고 두 분이 얼마나 고생을 해서 한 푼 두 푼 모은건데
돈으로 환산하면야 시골 땅 별로 값도 안 나가지만 귀한 땅이라 팔 수도 없고
찢어가질 수도 없고 난감하다.
우리형제들은 그저 당부한다.
가시기 전에 그거 다~ 쓰고 호의호식 하다가 가시라고.
엄마는 지금도 무조건 안 쓰고 안 먹고 아껴서 자식들에게 물려줘야한다는 주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을 위해 빛나게 잘 쓰셔서 참 다행이다.
복지관도 다니시고 운동도, 뭔가 배우는 것도 하도 열심이셔서 보는 우리가 다 흐뭇하다.
젊어서 미군부대에서 군복무를 하신지라 본토발음으로 영어도 잘 하셨었는데
이제 다 잊어버리셨다고 영어회화도 배우러 다니고 국내외여행도 열심히 다니시고.
나도 저렇게 늙어가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