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본격적으로 공부를 간섭하고 나선 것은 애들이 스무살 무렵부터다.
정작 이제 손을 떼어야할 시기에 웬 관심인지?
그 이전엔 회사를 다닐 때도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돈 버는 데에만 열심이었고
부자가 되기만을 꿈꾸었지 애들 교육에 대해선 관심도 별로 없고 협조도 안했다.
집에 들어오면 거실에 누워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TV를 왕왕~ 켜놓곤 했다.
늦게 들어오거나 해외출장이 많았길래 망정이지
아빠만 들어오면 집안이 온통 시끄럽고 정서적인 안정과는 거리가 먼
환경이 되었었다.
그땐 오히려 내가 더 교육열의가 높았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자식농사를 망치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생각했다.
돈이야 차근차근 벌고 사람농사가 더 우선이라고 여겨서
교육관련 투자를 항상 우선해서 했다.
거창하게 투자라고는 하지만 책 사는 일 따위를 말한다.
교육관련 강의라면 다 찾아서 들었고 내가 잘 모르니까 배우려고
교육학자들이 쓴 책들을 두루 섭렵했고 '친구 따라 강남가기'가 아니라
나의 중심을 지키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남편이 없을 땐 집에서 절대 TV를 켜지않았고
거실에 상을 펴고 일부러라도 늘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을 했다. 틈틈이 애들이 볼 수 있게 동화책도 좀 늘어놓고
연필도 일일이 깎아놓고.
컴퓨터도 일부러 좀 늦게 산 편이다.
게임이나 영상물에 눈을 뜨게 되면 활자에 대한 흥미를 잃을까봐.
그 덕인지 지금까지도 두 애들 다 컴퓨터 게임을 거의 안한다.
어려서부터 몸에 배지 않아서인 것같다.
가끔 책영업하시는 분들이 오면 이 집은 정말 공부하는 집같다고 했을 정도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날까지 단 한번도 대놓고 "공부해라" 한 적이 없다.
그냥 아무말 없이 엄마가 공부하는 척하고 있으면 애들이 다가오는
그런 분위기로 유도했을 뿐이다.
가끔 공부를 잘 하면 좋은 점이 무엇인지만 잠깐 설명해줄 뿐
본인들이 하고싶을 때까지 마냥 기다렸다.
이게 인내심이 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애들은 공부를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놀이터에 나가서 종일 뛰어놀았다.
우리애들이 하도 새벽부터 밤까지 놀이터를 주름잡고 뛰어놀아서
이웃집 엄마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을 정도다.
우리애들 때문에 자기집 애들의 학습분위기가 안 잡힌다고.
애를 왜 학원도 안 보내고 공부를 안 시키느냐고.
왜 둘째는 네 살이 다 되도록 말도 못 하느냐고.
우리딸이 과묵해서 말이 별로 없었을 뿐 말을 못한다는건 오해였다
우리집에 왔다가 애가 동화책을 소리내서 읽는 모습을 본 그 이가
암말도 못 하고 돌아갔으니까.ㅎ
놀기는 동네에서 둘째 가라면 서럽게 맨날 뛰어놀았어도
놀다가 들어와서 틈틈이 책도 읽고 셈도 배우고 또 나가놀고.
둘 다 그렇게 자유롭게 컸다.
나는 지금도 그런 훈련 덕분에 울아들이 해외에서 부모 간섭 없이도
비뚤어지지않고 자기관리를 하지 않았나 짐작한다.
우리애들은 지금도 남들이 엄마의 교육열이 어쩌고 하면 이해를 못 하겠단다.
엄마는 공부하란 잔소릴 안 했으니까. 점수결과를 가지고 왈가왈부해본 적도
한번도 없었으니까.
나홀로 부단히 연구하고 머리 굴리며 심리전을 펼친건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의 초등학교 시절엔 이런 적도 있다.
자기도 백점만 맞고 1등만 해보고 싶다길래
"초등학교땐 창의력과 이해력을 많이 키워서 이다음에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그릇으로 크게 키우는 거지, 시험에 연연하면 안된다. 일찍 자라."
"공부는 평소에 하는거지 시험공부를 따로 하지마라"
"70점만 넘으면 잘 하는거다."
"너는 크면 클수록 잘 할 수 있다. 엄마가 보기에 대기만성형이다"
그땐 아이가 "70점은 잘 하는 게 아니에요. 70점 안 넘는 애들이 거의 없어요."
그리고 "제가 진짜 대기만성할까요?" 그랬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어려서보다 지금이 여러모로 나으니
말대로 되었다고 본다.
그 부작용으로 우리애들은 아직도 시험공부를 안한다.ㅠㅠ
벼락치기는 나쁜 건 줄 알고....에고....지금은 좀 해도 좋으련만...
시험을 앞두고 누구는 종합문제집을 몇 개나 풀고 올백을 맞는다길래
"나는 네가 그런 작은 그릇이 되길 바라지않는다.
시험은 네가 뭘 알고 또 모르는 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점수가 안 나오면 더 공부하면 되고 잘 나오면 그런가보다 하면 된다.
시험에다가 너의 실력을 한정시키지마라"
내가 알기로 그 때 그렇게 엄마에 의해 억지로 공부 많이 하던 애치고
남보다 더 잘 된 애가 없다.
대부분 중고등학교 사춘기에 손에서 공부를 아예 놨지.
오히려 있는 듯 없는 듯 하던 애들이 더 큰 인물이 되었다.
이런 모든 게 내가 뭐 특별한 게 아니라 교육학자들로부터 간접적으로 배우고
나의 것으로 삼은 것뿐이다.
그런데 아들이 최근들어 기억해내는건
엄마가 여기 저기 하다못해 육군사관학교까지 견학을 데리고 갔다고.
(그땐 아들이 군인에 관심이 많을 때였고 일반인에게도 개방을 막 시작했었다)
자기가 궁금해서 질문을 했더니 외출하다말고 다시 현관문 따고 들어가
과학책을 꺼내서 보여주며 설명을 해줬다고.
자기가 원하는 역사책을 끊임없이 잘 사줘서 너무 좋았다고.
친구집에 가봐도 우리집처럼 책 많은 집이 없더라며
고맙게 생각을 해주니 나야말로 고맙다.
유학중에도 "어머니, 무슨무슨 책 좀 보내주세요" 하면
전혀 공부와 상관없는 교양서나 역사서 사회서적이라도 당장 사서 부치곤 했다.
수험생에게 전집류를 사서 국제우편으로 부치기도 했으니....
외롭던 시기에도 나쁜 짓 안 하고 책과 더불어 잘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들어앉아 공부하지마라. 이왕 간 거 나가서 배워라. 문화도 배우고 말도 배우고.
집안에서, 학교에서만 공부할 거였으면 국내에 있지 뭐하러 유학을 가겠니?"
그렇게 주문을 하니 애는 좋을 수밖에.ㅎ
나가서 세상구경도 하고 쇼핑도 하고...
어느날 가디언과 주임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개가 외출이 잦아요.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공부하지 않고 외출해요"
나에게 일렀는데 내 반응이 위와 같으니 무척 어이없어 하던 생각이 난다.ㅋㅋ
그 덕에 문법 같은 것보다 말하기 듣기에 강한 아이가 되었다.
외국어는 문법보다 말하기 듣기가 우선이지.
그래도 평소의 독서덕분인지 엣세이만 보는 대입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고
고등학교 교장선생님 축하까지 받으면서 입학했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잘 했다고 생각하는건 애들을 많이 웃겨주며 키운 것이다.
집안에 환자가 있으니 자연스레 분위기가 어두워지고 어디 마음대로 나다니기도 어렵고
그런 시기에 일부러라도 웃으며 지냈다.
안 그러면 우울증이 생길 지경이니 나도 살자고 한 거였는데
다행히도 애들이 유머감각이 생겨서 친구들 사이에서 그 부분 덕에
환영을 받는다고도 했다. 이건 생각지 못한 덤이다.
이때까지는 남편도 나의 교육관을 존중해주는 것같았다.
가끔 모든 게 현명한 마누라덕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고
세밀히 간섭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아이가 차례로 대입에서 첫번째로 목표하던 최고의 명문대학에 실패를 하고나서
엄마 때문에 애들을 버렸다. 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들볶게 된 것이다.
애들이 원래 안 그랬었는데 욕심도 없고 느긋한 애들로 변했다.
셋이 모이면 왜 웃고 떠들기만 하고 쓸만하고 유익한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큰 교회로 옮겨가보니 너무나 스펙이 후덜덜한 남의집 자식들이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시모 닮아서 샘도 어지간히 많은 남편이 이제 부럽다못해 배가 아프고
나도 이제부터라도 애들을 들볶아 더 잘 키워보자.
이런 심리가 작용하는 것같기도 하다.
물론 남들에게 내세우기도 좋게 그런 스펙을 가지면야 좋겠지만
우리애들 그릇크기도 있는 것이고 우리집안 환경과 형편도 생각을 하며
감사를 알아야지. 남과 단순히 비교만 해서 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남편 친구중에도 애들이 어려선 두각을 나타내지 않다가
차츰차츰 잘하게 되면서 결국은 의전이나 법전에까지 진학한 아이들도 있다.
가만히 보면 그 부모들도 공통점이 아이들을 들볶지 않는다는 거다.
그저 아이들이 하는대로 지켜볼 뿐이고 가끔 조언만 할 뿐이고
무엇보다 생활이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남편이 저 집 중 하나와 비교를 하는 것같길래 내가 받아치기를
요즘은 3대가 노력해야한단 말도 모르냐? 조부모의 경제력, 부모의 교육열,
본인의 의지.
그 집은 서울시내에 집 한 채씩 부모가 사주고도 물심양면으로 거들어준 집이고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뒷바라지에 더 신경을 쓸 여력이 됐고 또 본인들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더 열심히 했을 것 아니냐?
우리집을 봐라.
도무지 공부할 여건이 되었냐? 단칸 셋방에서 시작해 살림도 쪼들리고
먹는거 입는거 넉넉지도 않은데 맨날 돈 가져오라고 볶는 이기적인 시부모에
몸바쳐서 효도하라고까지 요구해서 애들이랑 그렇게 희생을 했어도
당신이 중간 역할을 한 번이라도 해줘봤냐? 자기 부모 중한 줄만 알았지
처자식에게 관심이나 있었냐? 애들 교육에 협조를 한 번 해봤냐?
대리효도나 시키고. 효도는 셀프라는 것도 모르냐?
그런 부모도 자기가 선택해서 태어난거 아니니
저런 말을 나도 되도록이면 하고싶지 않다.
그런데 먼저 건드리면 나도 터질 수밖에.
왜 가만히 있는 애들을 건드리냔 말이다.
나는 힘든 환경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자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어쩜 같은 애들을 놓고도 나는 이뻐죽겠고, 한 사람은 미워죽겠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