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세상이야
영감은 거래처엘 다녀오는 길에 쓰러졌단다. 옆에 섰던 젊은이가 119로 전화를 하고, 달려온 엠브런스에 동승한 의사의 현명한 판단으로 뇌 전문병원으로 내달았단다. 빠른 진료를 받아, 뇌의 손상이 적었고 회복도 빠르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각박한 세상이라 하지만, 이만하면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미국의 큰딸과 일본의 막내아들에게는, 영감의 상황이 좋아지고 나서야 연락을 했더니…. 그래도 오겠단다. 큰딸에겐 영감의 거동을 동영상으로 보이며 달랬으나, 일본의 막내아들은 연락도 없이 헐레벌떡 입국을 한다. 월차를 낸 큰아들이 밤낮을 애쓰고, 마누라는 막내딸의 실어 나르는 수고로 따신 잠을 잤으니 지금 생각하니 고얀지고.
그러고 보니 ‘절대로 자식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리라’던 자신감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었구먼. 나이 먹고 늙어 여기저기 약해지니, 청하지 않아도 자식들이 다가서더라는 말씀이야. 에구~. 내 영감의 와병이 타인에게야 본인의 종기만 하겠는가. 이쯤이면 내 독자가 식상하겠다. 그래도 걱정해주는 님들을 위해서 현재 영감의 상태를 쬐끔은 더 얘기 해야겠구먼.
영감은, 남들이 보기에는 멀쩡하고 가까이에서 보는 식구들은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이건 제 삼자의 입장이고 본인으로서는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다. 사업장을 후배에게 인수한 뒤로는, 워낙 말 수가 적은 사람이긴 했으나 입이 더 무겁다. 누구와도 만나기를 싫어해서, 식구와 시누이들 외에는 대면을 하지 않는다. 저러다가 우울증 올까봐 걱정이다.
“말하는 건 문제가 없니?”라며 지인들은 묻기도 하고,
“손발은 제대로 쓰냐?”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 허긴. 뇌출혈이라는 병이 가벼운 병은 아니지. 아직은 뇌에 고인 혈량에 마음을 놓을 단계는 아니지만, 이만한 것도 고맙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의술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예전엔 대부분 반신불수가 됐다지.
영감의 와병에 협조해 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중보기도, 새벽기도로 영감의 쾌유를 빌어준 교인들. 119로 전화를 건 젊은이. 앰브런스의 의료진들. 주문한 6인분의 식사를 두 말 없이 취소해준 음식점의 사장님. 영감의 짧은 입맛에 맞는 동김치국물을 떨어질 새 없이 공수해준 권사님. 또 ‘미국에 갔나? 일본엘 갔나?’ 걱정했다는 이웃들. 그리고 또….
각방을 쓰던 일을 영감의 퇴원과 함께 접는다. 나란히는 아니어도 한 공간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긴 병에 효자 없다’지 않은가. 나라고 다르겠는가. 24시간 영감만 들여다보며 보내는 건 재미없는 일이다. 머지않아 실증이 날 게 뻔하지. 나는 원래 살가운 마누라가 아니었잖은가. 가게 일이 바쁠 것은 없으나, 오르내리며 심란한 내 마음도 다스려야겠다.
한 해를 보내며 고맙고 감사했던 내 이웃들에게 다시 한 번 더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