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웃으면 내가 행복하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하다. 이제 아무런 재미도 없구나 싶어서 외롭다 했더니, 참으로 예쁘고 귀한 손녀 딸아이를 보내주셨다. 오호라. 것도 며느리와 잘 지내라고 아니, 며느리를 더 없이 귀한 존재로 만들 량으로 그 며느리를 통해서인 데에야 오묘하다 할밖에. 그래서 내게 며느리가 더 귀한 존재인지는 모르지만, 며느리 얘기는 좀 접어두고 오늘은 손녀 딸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내게 딸린 사 남매는 딸이 둘이고 아들이 둘이라고 일찌감치 이실직고(以實直告)를 했으렸다. 그 아이들 차례로 고등학교를 아니, 중학교 때부터였던가 보다. 그때부터 아이들은 내게 황제로 굴림을 했지. 왜냐. 대학엘 들어가야 하겠으니 어쩌겠는가. 내 딴에는 그들의 시녀로 몸종으로 몸 바치고 맘 받쳐서 받들어 모셨거늘, 시방은 다 제 잘난 맛에 살더라는 말씀이야.
암튼 이래저래 아이들은 내게서 멀어졌고, 그게 이 세상의 이치라는 데에야 내 자식만 탓할 이유는 아니지. 어느 날 불현듯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머리는 백발이요 어깨는 엉성한 영감만 뒷짐을 진 채 내 등 뒤에 섰으니 그 행색이 말이 아니더라는 말씀. 젊었을 적(跡)엔 그래도 자랑삼아 내 보일만도 하던 모양새는 어디에다 몽땅 저당(抵當)을 잡혔는지.
워낙 말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나마 기력이 달리는지 점점 더 말 수가 적어졌겠다?! 항상 내 쪽에서 먼저 앙앙거려야 턱을 들어 눈을 내려 부릅뜨거나 운이 좋으면 피식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주더니, 이젠 그마저도 구경하기 어렵구먼. 나도 늙기는 마찬가지지. 아침에 현관을 나서는 영감의 등에다 대고 나도,
“다녀오세요.”하면 고작이고,
“응.”하는 영감의 대답을 들으면 그만이었고. 것도 기분이 내키는 날에만.
“늦었네요.”하는 날이면, 것도 제법 좋은 기분이었을 때 선심이나 쓰는 듯,
“응.”하면 그만이었어라.
잘 길들여진 식모(食母)처럼 40여년 넘게 익혀온 식성(食性)이니, 상 위에 뭘 올려야 하는 지는 물을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지. 챙겨놓은 대로 투정도 요구도 없이 식사를 끝내고, 곧 안방 TV를 독식하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아무와도 상관(相觀)을 않는 게 그이의 일상이었다. 입이 궁금하겠다 싶으면 과일이라도 건네주고, 또 얼마쯤 지나 입이 마르겠다 싶으면 차(茶)라도 한 잔 들고 들어가 내려놓으면 족(足)했지.
그러나 2008년 겨울. 더럽고 말 많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놓고도 모자랐는지, 푸짐한 눈이 아직도 멋지게 내리던 1월 9일. 아기다리 고기다리던(?이건 너무나 행복한 내 맘을 표현하며 웃어보자고 일부러 띄어쓰기는 내 멋대로 하자.) 손녀 딸아이의 고고지성(呱呱之聲)을 들으면서 우리 집은 발칵(?) 뒤집혔다. 아이들 말을 빌리자면, 분위기가 가히 360도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내 막내아들 녀석이 시방 서른 한 살이니 족히 30여 년만의 환희(歡喜)다. 외손녀 딸아이를 둘이나 길러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외손녀가 아닌가. 외손녀라서 이러쿵 친손녀라서 저러쿵은 못하겠다. 영악한 내 큰딸 년이 입에 거품을 물고 뛰어오지 않으려나 모르니까 ㅋㅋㅋ.
암튼 이제 영감은 현관을 들어서면서부터 입이 귀에 걸린다. 아니 대문에서부터라 함이 옳겠다. (이쯤에서는 아가의 그 예쁜 이름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지?)
“보림아아~.”로 시작해서,
“까꿍!”하는 건 점잖은 애교다. 계단을 오르며 까꿍 자세로 엉금엉금 기다가, 손녀 딸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쳐 보라지. 누가 볼까봐 두려우니 가히 가관(可觀)이로고.
결혼하고 40여 년을 살면서, 나는 그이가 소리를 내어 웃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남들이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할라치면, 그이는 그저 입을 귀에 걸어놓는 것으로 족(足)했다. 그것이 영감을 향한 나만의 기우(杞憂)가 아님에 걱정은 하지 않는다. 내력(來歷)이다. 내 시아버님이 그러셨고, 내 시어머님도 그러하셨다. 두 분의 웃음 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음이야.
그런데 보림이의 소위 말하는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말씀이야. 그녀가 기어 다니면, 그 긴 다리를 접고 손녀와 같이 기어서 거실을 맴돌며,
"허허허." 웃기까지 한다. 벌건 허리가 들어났으나 개의치 않는다. 며느리가 뒤에 섰어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품에 안은 아이가 ‘쉬’를 하며 속옷까지 적셔도, 아이가 그 일을 멈출라 싶어서 요지부동(搖之不動)인 채 행복하다고 껄껄댄다. 술이나 한 잔 걸치고 들어오는 날이 되어보라지. 세상에 저렇게 행복한 남정네는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지 싶다.
‘나’라고 다르겠는가. 부창부수(夫唱婦隨)가 아니더라도 나는 시방 충분히 행복하다. 저 작은 사람이 어쩌자고 그 무겁고 큰 행복을 내 집으로 실어왔느냐는 말이지. 아들? 딸? 어떻게 그들을 손자에 비해?! 지금도 조그만 몸집의 그녀는 내 방에 들어와서 부산스럽게 설쳐댄다. 음정도 가락도 맞지 않는 노래를 볼타구니에 홍조를 띄고 흥얼거리며 온통 일거리를 만드느라고 분주하다. 아무려면 누가 뭐래. 그녀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고, 그래서 보는 내가 이만큼 행복하면 그만이지.
저 조그만 사람이 없었을 때 우리는 뭘 하고 살았을꼬. 그저 숨을 쉬는 것만이 살아있음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적지않은 투자로 꾸며놓은 거실의 황토벽에 아들은 대못을 꽝꽝 때려 박는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로되, 그래도 웃음이 나온다. 거기에는 앙증맞은 옷들이 사지(四肢)를 벌린 채 색색이 걸려서 나풀거릴 것이고, 나는 그 조그만 옷들을 바라만 보고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시방 내겐 며느리가 더 없이 소중한 존재(存在)다. 큰 병을 이기고 다시 사는 내 삶이, 며느리를 통해서 얻은 아가로부터 더는 바랄 수 없을 만큼의 행복을 얻었으니까.
( 할아버지는 나만 보면 행복하다 하신다^^) (김장 하는 날 나는 엄청 바빴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