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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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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왜?- 헛 똑똑이


BY 만석 2009-12-03

 

헛 똑똑이

  영감의 배웅을 받으며 막 대문을 나서는데, 근사한 승용차 한 대가 대문 앞에 선다. 너무 바짝 세워서 겨우 몸을 비껴 나서야 한다. 골목이 좁으니 그쯤은 이해를 해 왔던 터라, 별 일 아닌 척 걸음을 옮긴다.
  "왜? 시비 좀 하시지……."
  오이~ㅇ?! 낮익은 목소리다. 시 외삼촌의 음성이다.
  "어머나. 어머나. 외숙모~! 이모! 나 학교에 가는 길인데……."
  요런, 요런. 아니, 인사나 드리고 말을 할 것이지……. 아무튼 큰일이다. 학교에 갈 시간이 빠듯한데 말이다. 더군다나 엄니의 친정 동생 분들이 아니신가. 추석 밑이라 작정하고 모여서 오신 게 틀림없다.

  거실까지 되돌아 들어와 모두를 앉혔지만 마음은 콩밭에 있다. 서로 엄니의 야윈 손을 붙잡고 말을 잊지 못한다. 그러게 자주 좀 찾아 뵙지이~! 쟁반에 쉬운 대로 음료수를 꺼내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드시라는 뜻을 비친다. 아무도 내 등교 길을 걱정하는 이가 없다. 아이구~. 속 터져~. 어쩐다? 어째? 어쩔까? 기다리다 못해 용기를 낸다. 그래도 만문한 양반은 역시 외삼촌이다. 외삼촌은 평소에도 나를 무지 사랑하셨으니까. 으~흠. 마른 침을 꼴깍 넘기고, 최대한 애교스럽게 아니 어리광스럽게. 지금 생각하니 아마 실눈도 만들었을 걸?
  "흐~ㅁ. 외삼촌. 나 학교 가라고 그래 주세요. 오호호."
  "응. 그래. 가거라. 가야지. 늦을라. 가~."

  외숙모가 일어나신다.
  "이거나 받고 가. 이거."
  들고 들어오신 쇼핑백을 내어민다.
  "엄니 드리세요."
  "아냐. 이건 자네 걸세."
  "어머. 그래요? 와우~. 신난다."
  이럴 땐 최대한 오~바를 하는 것이 좋다.

  엄니를 돌아보며,
  "외숙모가 화장품 사오셨어요."
  "내가 무신 화장을 한다구..."
  "내 것인디요. 그려요. 엄니도 나눠드릴게요. 오호호."
  모두 밉지 않다는 웃음을 보내신다. 기사로 온 이모님의 맏아드님도 어깨를 흔들며 웃는다. 이구~. 오늘 별 탈 없이 학교에만 가게 된다면 모두가 예쁠 것이구먼. 한 번 더 웃기자. 그래야 내 신상에 좋을 걸?! 화장품을 장농 안에 깊숙하게 숨기며,
  "감춰 놔야지."
  "하하하."
  "껄껄껄."
  "킬킬킬."
  자~. 이만하면 됐다.

  "이모. 죄송해요. 외숙모 죄송해요. 서방님도 죄송해요."
  쭈~ㄱ 둘러앉은 모두에게 최대한 깊이 허리를 숙여 사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아, 영감에게도 한 마디 어리광을 부리고 나서는 게 좋을 성싶다. 다시 현관문을 빼꼼히 열고,
  "아빠. 나 간다아~. 아빠한테도 미안해. 엄니한테도 미안혀요~"
  말은 없지만 영감의 표정이 환하다. 엄니도 아마 들으셨나보다.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신다. 잘 했다. 참 잘했다. 후후후. 오늘은 제법인 걸?!

  "휴~. 으흐흐흐. 학교에 다니는 일은 참 여러 면으로 좋구먼. 아니었어 봐. 지금쯤 지지고 볶고 무치고 튀기고……. 크~~~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을……. 후후후.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엄니에게도 영감에게도. 아니, 오늘은 엄니 동기간들에게도 무지 감사한 걸?! 막내딸아이의 소리가 생각난다. 등교 차 대문을 나서는 며느리에게 엄니가,
  "조심해서 다녀와." 하시던 뒤에,
  "엄마. 뭘 더 바래요."하던 말이 귓전을 스친다.
  지금 나는 폴카 스텝을 밟으며 등교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과의 친구들에게 먹인다고 송편 한 관을 들었는데도 말이다. 이 쪽 어깨에는 책가방을 매었는데 몸이 이리 가벼울 수가.

  다음 날.
  "아빠. 이모네 전화번호 알아? 전화라도 한 통 해 드려야잖어?"
  "뭐~ㄹ. 괜찮어."
  "어제 괜찮았어? 기분 안 좋아서 가시지 않았어?"
  "으~ㅇ."
  치.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면 안 되남? 말하다가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영감은 늘상 저 모양이다. 아무래도 전화를 드리는 게 좋겠다. 오~라. 돌아보니 영감은 돋보기를 쓰고 전화번호를 찾는 중이다. 그러면서도 뭘…….

  나는 전화통에 매달리고 영감은 전화번호를 부른다.
  "이모. 저예요. 어제 죄송했어요."
  "뭘~."
  "엄니가 많이 수척하셔서 맘 아프셨지요?"
  에구. 너무 정확한 전곡을 찔렀나? 수화기로 한숨이 흘러넘친다.
  "죄송해요. 제가 잘 모시지 못하나 봐요. 지난 더위에 갑자기 그래지셨어요."
  "뭘 잘 못 모셔서 그래. 자네, 잘하고 있어. 이젠 갈 때가 되신 게지. 니가 애쓴다."
  "죄송해요, 이모. 잘 해드려야 하는 건데……."
  요런, 요런. 앙큼한 년. '워낙 엄니가 입이 짧아서…….'라는 소리는 목젖으로 눌러놓고…….

  "아, 외삼촌 저예요."
  "오~. 그래."
  "어제는 죄송했어요. 엄니가 수척하셔서 맘 아프셨지요?"
  엄니의 하나 뿐인 남동생이다. 누님을 당신의 어머니만큼이나 사랑하신다. 가느다란 한숨이 울리는데 허허 웃음으로 넘기신다. 체구는 작아도 외삼촌은 역시 남자다.
  "외숙모한테 화장품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엄니한테 잘 하라는 뜻인 거 접수했다구 말씀 드려주세요. 오호호."
  이럴 땐 선웃음이라도 따라야 한다. 아니면 말의 형식이 너무 사무적이 된다.
  "허허허. 무슨 그런 뜻이 있을라구……."
  "저, 엄니한테 잘은 못 해도, 못되게 굴지는 않아요. 걱정 마세요."
  "그걸 누가 모르나? 잘 알어."

  이쯤이면 만사 오케~이.
  "아빠. 나, 잘 했지?"
  씽끗 웃고 돌아서는 영감, 과히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아, 엄니가 남았네. 엄니 방문을 연다.
  "엄니요. 어제 진짜루다가 서운하지 않았슈?"
  "서운하긴, 뭘. 그래두 어제는 애비가 있어서 괜찮았어."
  어제 내가 집을 나선 뒤가 궁금하다. 여기서 진위를 알아보자.
  "어제 외삼춘이랑 이모가 욕하셨지유?"
  "아~~~녀. 욕은 무신. 너, '용타'들 혔어."
  우히히히. 그랬구나. 좋~았어. 으~ㅁ. 좋았다구.

  엄니요~. 다 엄니를 잘 만난 덕이구먼유. 만약에 엄니가,
  "그 나이에 무신 핵교는 다니는가 몰러~."라고 한 마디만 하셨더라면, 지는 집안에 문제 덩어리로 묵사발이 되는 것인디……. 지금은 진짜루다 하는 말이어요. 사랑하요 엄니요. 시방, 지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세우고 하트를 그리고 섰슈. 그래도 '엄니 사랑한다.'는 말은 목구멍에서 맴만 도는구먼유. 나는 어째서 엄니더러 사랑한다는 소리를 못할꼬? 아이구~. 이 헛 똑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