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敗子)들의 승전가(勝戰歌)
“복학 신청했어?”
“어!”
“수강 신청두 하구?”
“어!”
“등록금 인상분 내야잖어?”
“아~니. 등록하고 휴학해서 안 내두 되요.”
“잘 알아 봐. 괜히......”
얼라리?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내 복학 날짜며 수강 신청 날짜를 어찌 알아? 생각지도 않았던 영감의 친절에 갑자기 멀쑥해진다. 영감이 이리 챙기니 내 맘이 약해지는 걸?! 돌솥을 꺼내? 꺼내 봐? 아니지. 지금은 전쟁 중인데?
사실 엄니의 죽을 쒀야 하기 때문은 핑계이고, 전쟁 중이라 명(命)함도 못 된 내 성미의 탓이다. 전쟁 중이라 함도 자존심을 등에 업은 내 심통이라 함이 옳겠다는 말씀이야. 더군다나 홀로 사는 법의 전수도 가증스러운 야유에 불과하다. 그이가 홀로 남으라는 법이 어드메 있는가. 내가 홀로 남아 그동안의 소홀함을 뉘우치며 꺼~이 꺼~이 통곡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단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이제는 등 굽을 날이 멀지 않아 돌솥밥을 대령하기가 힘이 든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이리 못 된 마누라의 복학과 수강을 챙기는 영감이고 보면, 홀로 남아도 돌솥밥 대령하던 마누라를 별로로 생각하지는 않겠구먼. ‘그 년 잘 죽었다.’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마누라였다.’고 추억하게 만드는 게 더 나을 것도 같은데?! 이제껏 돌솥밥을 지어 대령한 긴 세월이 억울해서라도 말이다. 돌솥을 꺼내? 말아? 꺼내?
사실 그동안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먹기 싫은 밥을 억지로 삼키는 영감도 영감이려니와, 덩달아 수저를 놓으시는 엄니가 더 문제였다. 그이는, ‘나는 바담 풍 해도, 엄니는 바람 풍 하시라.’는 식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밥을 적게 먹어도 엄니는 많이 자시라.’하니, 엄니 마음이 어디 그러신가. ‘효도하는 마음으로 주발을 비우라.’는 마누라의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엄니를 생각해서 영감은 아마도 서너 숟가락은 더 떠 넣었을 게다. 그만하면 가상하다 할 수도 있겠으나, ‘칼을 빼었으니 무라도 자르리라.’는 내 고집이 솔직히는 나도 미웠다. 엄니도 저녁마다 통화하는 따님들에게 그날그날의 전세(戰勢)를 보고하셨겠지. 그게 재미있어서 엄니의 따님들은 얄밉게도 더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른다.
에~라. 선심 쓰는 척 돌솥을 꺼내려니, 어랍쇼? 깊숙이 들여놓은 돌솥이 간 곳이 없다. 이 건망증. 또 어디다 모셔놓고 찾지를 못하누. 꽁무니를 하늘로 치켜들고 싱크대 바닥을 더듬어도, 의자에 올라서서 만세를 불러 봐도 돌솥의 정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주방 맞은 편. 소파에 앉았던 영감이 내 하는 짓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뭘 찾어?”
“돌솥.”
“없어. 찾지 마.”
“?”
영감은 읽던 신문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없앴어.”한다.
“…….”
영감은 절대로 물건을 버리는 성미가 아니다. 곧이들리지가 않아서 이 구석 저 구석을 쑤셔댄다.
“없다니까. 근데, 돌솥은 왜?” 여전히 시선은 신문 위에 둔 채다.
“밥하려고.”
“그냥 해.”
“내가 솥에다가 하구 싶어서 그래.”
내 목청은 참 묘하다. 목소리가 어느 새 나긋나긋하니 제법 어리광에 절어 있다.
“잘 먹는데 뭘…….”
얼라리?! 영감의 목소리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친절한 목소리도 아니다. 솥단지를 치우긴 치운 모양이다. 왜 일까?
그 뒤로 오늘까지 돌솥은 자취가 없다. 도무지 영감의 의도를 모르겠다. ‘내, 더러워서 돌솥밥 얻어먹지 않으리라.’는 의도였을까? 아니면 정말로 내 힘든 사정을 봐 준 것일까? 왜냐고 물어도 함구(緘口). 화가 났느냐고 물어도 무언(無言)이다. 주고받는 말이 있어야 싸움이라도 될 것이 아닌가. 내 모양새만 우스워졌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서 영감을 이긴 것도 아니고, 오지랖이 넓은 척 돌솥을 찾아내지도 못했으니…….
“잡곡이나 섞으소.”
오잉?! 이건 내 뜻에 동의한다는 감동이리라. 이럴 땐 가볍게 다가가며 응석을 부려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렸다.
“…….”
마누라가 말이 없으니 영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본다.
“보리나 콩을 좀 둬 봐.”
“…….”
보리를 두고 콩을 좀 둬? 일리가 있는 말이다. 밥솥의 그 특유한 냄새를 제거해 보라는 뜻이렸다. 그래. 그래 보자.
저녁부터 보리와 콩을 박박 섞어 영감의 주발을 채운다. 영감이 주발의 잡곡밥을 모두 비운다. 옳거니. 이젠 됐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영감은 주발을 깨끗이 비운다. 이럴 땐 나만의 비방이 있지. 엄니를 챙겨 영감에게 생색을 내자. 아마 그이는 내가 돌솥밥을 지어 대령하는 것보다 더 좋아할 걸?! 이미 그리 하고 있음을 보여주자.
“엄니요. 죽에 녹두가 잘 풀어졌슈? 국산이라고는 하는디, 믿을 수가 있어야제.”
엄니의 청력을 걱정하며 큰 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영감이 들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처음에는 뭔 죽인지두 모르구 먹었는디, 구수한 게 녹두였구먼.”
“그라믄, ‘구수한 게 참 맛이 좋구나’하고 칭찬을 좀 하셔야제~.”
“이~. 앉아서 바빠 날뛰는 사람이 해 주는 밥 얻어먹기가 미안시러버서 그라제.”
“그래두, ‘씹을 수가 없다’고 하셔서 어제는 묽게 죽을 쒔더니 또, ‘오줌만 자주 누러 다니겠다’구 투정은 하시드마. 아, 칭찬은 아껴서 뭐할라요.”
“그렸어?”
이쯤만 하자. 잘 못하다가는 영감이 고부의 다툼으로 알겠구먼. 그렇지만 이 한 마디는 더 해 놓는 게 확실하겠다.
“엄니요. 엄니 아들이 엄니 죽 쒀 드리라고, 자기는 전기밥솥 밥을 먹기로 했다 안 하요.”
“아이구 그라믄 좋제. 진즉에 그랬어야제. 이제는 내도 죽 그만 쒀. 밥 먹을 겨.”
슬쩍 곁눈질해 본 영감의 미간에 잔잔한 웃음이 스친다. 됐다. 이제는 확실히 됐다.
가만 있자. 그러면 이 싸움의 승자(勝者)는 누군가? 나는 아주 무거운 감정으로 영감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몇 며칠 동안 그 끔찍한 전쟁(戰爭) 아닌 전쟁을 치루지 않았는가. 그러면, 기여히 전기밥솥의 밥을 먹이는 내가 승자인가? 아니면 작심(作心)을 하고 돌솥을 없앤 영감이 승자일까? 전자(前者)는 절대로, 절대로 승자는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후자(後者)도 승자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영감도 나도 승자는 아니다. 영감은 시방 전기밥솥의 밥을 기분 좋게 먹어 치우고, 나도 결국은 돌솥을 찾아다녔으니 말이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둘이 모두가 패자(敗者)다. 확실한 건 영감도 나도 지금, ‘패자’치고는 기분이 과히 나쁘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디, 좋은 기분이니 노래라도 불러 봐? 요즘 아이들이 하는 말 대로, 그까이 것! 어감도 좋지 않게 ‘패자’라고 할 게 뭐람. ‘승자’라고 해 둬? 에~라. 어쨌든 전기밥솥의 밥을 영감에게 먹게 하는 숙원은 이뤘으니, 오지랖이 넓은 척 영감에게 ‘승자’를 양보하자. 시방 난 ‘패자’라도 기분이 좋다. 곧 노래도 나오겠는 걸? ‘패자(敗者)의 전승가(勝戰歌)’라.
엄니요. 그도 괜찮은디?! 히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