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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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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뿌린 씨앗이라고?(12) - 증오의 칼날은...(최종회)


BY 솔바람소리 2011-01-20

누군가 그랬다. 우리 부부는 너무 멀리와 버렸다고... 끊어질 듯, 모진 인연의 고리가 처음부터 위태롭게 이어져왔다. 그리고 끝을 암시할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지만 지금껏 아슬아슬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신한테 미안하지만 새해 혼자서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사에 다녀왔어. 무릎이 까지도록 절을 했는데... 난 왜 되는 일이 없을까?”

“...!...절에서 절을 했다고?”

“응.”

힘겨울 때마자 천수경을 꺼내어놓고 읽곤 하던 내게 남편이 비아냥거리며 했던 말은 ‘부처를 믿을 바에야 나를 믿어라. 요즘 중들은 개고기도 먹고 술도 먹고 별짓거리 다 한다더라.’ 억지들뿐이었다. 때론 ‘교회나 다닐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로 속을 긁어대곤 했었다. 남편과 같은 믿음을 지니고 싶었다. 그것이 부처님이라도 좋고 하느님이라도 좋고 성모마리아님이어도 상관없었다. 뭔가 공유를 한다면 서로를 이해하기 쉬울거란 생각에 교회를 다니는 것도 좋겠다는 답변을 했을 때 그는‘하나님 아버지, 아멘’장난스레 뱉어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피하고 말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홀로 절을 찾았고 무릎이 까지도록 절을 했다고 했다.

“뭘 위해서 절을 했어?”

정말 궁금했다. 신도들조차도 간절한 마음을 지니지 않고는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가 무슨 마음으로 절을 찾았는지, 아니 그 말조차 거짓이 아닐 런지...궁금했다.

“가족을 위해서 했지...”

“.........”

“처음엔 독한 당신이 미웠다. 아니 무서웠어.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이나 했으니 나같은 놈이 이만큼이나 하고 사는 거라고. 그 절 스님이 그런 말을 하더라. 당신과 대화를 해보라고...”

대화... 그 역시 내가 간절히 바라던 하나였다. 제대로 된 대화... 그가 말하고 내가 듣고, 내가 말하고 그가 듣기... 그리고 서로의 입장에서 이해하기를... 그 간단한 것을 우린 그동안 할 수 없었다. 우유부단한 성격의 남자와 고지식한 여자 사이엔 높다란 불신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매순간. 대화로 시작된 말이 언쟁이 되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가 거듭될수록 그를 향한 마음과 입과 귀를 닫게 되었다. 그는 그런 내게 매번 술에 취해서 대화를 하자고 했었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술주정일 뿐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

“나도 사람인데 미안하지 않겠냐? 잘 살고 싶었어. 내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안 되는 걸 어떡해.”

그가 잘 살겠다고 노력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동안 공사를 따기 위해서 술을 마셨다고 했다. 명세서 날아온 적 없는 카드 값이 한 달이면 3~4백만원씩 겨우겨우 빠져나가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봤고 그것을 따지는 내게 일을 하기 위해 물건 값이 결제 된 것이라고 당당히도 말했었다. 평균을 넉넉잡고 따져 계산을 해봐야 한 달 생활비로 돈 백만원도 못주는 사람이 말이다.

휴일이나 주말이 다가오면 아이들을 제 아비에게 가까운 곳이라도 좋으니 함께 바람 쐬러 가자고 졸라대곤 했었다. 때마다 그의 대사는 어딘가에 적어두고 읊는 사람처럼 똑같았다. 며칠의 여유 시간이 있으면 ‘그래, 가자!’ 잔뜩 바람을 집어넣었다가 약속된 날이 익일로 다가오면 ‘아빠, 내일 새벽같이 일 나가야 돼.’하는 바람 빠지는 대사로 바뀌곤 했다. 그리고 당일이 되면 늦게까지 잠을 잤고 그것을 따지는 아이들에게 ‘전화 올 때 기다리는 거야. 전화 오면 당장 나가야 돼.’귀찮다는 듯 짜증을 내며 굳건히 잠자리를 지키고 누워있기 일쑤였다. 18세 되는 아들이 자라는 동안 목욕탕 간 횟수가 손가락 다섯 개를 꼽지 못했다. 아들과 딸의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한 적도 없었다. 집안에 대소사에도 수중에 돈이 없으면 우리들만 보냈고 돈이 있으면 뒷일은 생각 않고 물 쓰듯 대책 없이 써대곤 했다. 그것을 탓하는 내 말은 잔소리였고 시비일 뿐이었다. 내 의식 속에 있는 남편은 그저 무책임했고 대책이 없었다. 그가 했다는 노력을 인정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

“당신도 힘든 거 아는데... 나도 참 힘들다. 나 요즘 술도 잘 못 마셔. 몇 잔 먹지 않아도 ‘홱!’ 가버려. 나더러 사람들이 왜 이렇게 변했냬. 매일 얻어먹기만 한다고...당신도 봐서 알잖아. 요즘 나 카드도 별로 안 쓰는 거”

매일 얻어먹고 살았다던 사람이 새삼스레 꺼낸 말이 오히려 귀에 거슬렸다. 변했다고? 매일 얻어먹어서? 요즘 결제되는 카드 값 금액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생활비로도 못주는 돈이 겨우겨우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결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집으로 캐피탈에서 걸려오는 상냥한 목소리의 여자가 남편을 찾곤 한다. 카드결제금만큼은 역사적인 사명감을 지니고 해결해내고 있었다.

“그런 말 구차하게 할 필요가 뭐가 있어? 지금처럼 그렇게 혼자 살면 되잖아. 우리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 뭐가 있어. 서류 정리하고 마음 편히 살어.”

“나를 버리겠다는 거야? 당신은 옛날부터 그 말 참 쉽게 하더라.”

“자기가 우리를 버린 거야. 잘 생각하고 말해”

“그렇게 되나... 그래... 그런 거도 같다... 그럼 또 내가 할 말이 없어지지... 당신 힘든 거 아는데... 참아 줘. 나도 생각이 있으니까.”

“뭘 더 참아야 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이곳을 벗어 날 수가 없어. 서류라도 정리가 된다면 애들 데리고 떠날 생각이야.”

“......나란 놈 만나서 고생한 거 알어. 하지만 당신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를 믿지 않았잖아.”

“그랬어. 믿지 못했어. 지금도 믿지 못해.”

“알어. 내가 못된 놈이다. 내가 벌 받나보다. 그래도 난 당신이랑 헤어질 수 없어. 애들 데리고 떠난다는 말... 당신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 말도 지키겠지... 하지만 조금만 참아봐... 당신이 밥 먹으러 오라고 했을 때 절을 많이 해서 그런지 다리에 알이 베어 움직이기가 힘들더라구. 무릎이 까지도록 절을 했는데도... 뭐가 나아지는 게 없네...”

“절을 다녀왔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그건 감동이야. 하지만 절 한번하고 뭐가 크게 달라지길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지. 어쩜 이 시간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부처님의 가피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 되나? 그렇게 따지면 그런 것도 같네.”

전화를 끊기 전 그가 말했었다. 오전에 일 끝나는 대로 집에 들러서 폭탄처럼 터져버린 욕실의 전구와 다시 경고의 빨간 불빛이 반짝이는 보일러를 손봐주겠다고.

나는 부쩍 지쳤었다. 이 끝도 없고 답도 없는 기나긴 남편과의 싸움에서. 이제는 쉬고 싶을 뿐이었다. 증오의 칼날을 갈고 그를 향해 휘둘렀지만 매번 다치는 쪽은 나뿐인 듯 했다. 어느 책 문구에 이런 말이 있었다. <증오의 칼은 굽어 있다. 그것을 휘두르면 다치는 쪽은 칼을 쥔 자이다.>

남편은 다음날도 그 다음 날에도 집에 오지 않았다. 오기는커녕 통화를 했던 날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전화를 해서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차를 박았다며 보험회사와 연결시켜달라는 통보만 하고 끊었다. 어떤 상황에서 어느 정도의 사고인지에 대한 부연설명도 없이. 그리고 그날 하루 종일 전화가 꺼져있는 상태로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상황은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사라져버렸던 의욕이 꿈틀됨을 느낀다. 남편과 상관없이... 어떤 걸림돌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선다고 하더라도 이제 더는 쓰러져있지 않을 것이다. 난...나니까... 당찼고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던 나니까... 더는 나약하게 속으로 증오의 칼날만 갈고 있지 않을 것이다. 더는 나답지 않은 나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내가 뿌린 씨앗으로 인해 이런 고난 속에 놓여 진 것이라면...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새로운 씨앗을 뿌려볼 테이다. 자갈이 나오면 고를 것이고 잡초가 나오면 뽑을 것이다. 뙤약볕이 따가울 수도 있을 테고 비바람에 전전긍긍할 수도 있을 테지만... 더는 징징거리며 호미자루 패대기치지 않을 것이다. 숨을 고르며 내 밭을 꾸려 갈 테다. 그게 나다운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