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발신번호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고 받았다. 주소록에 저장되어 있는 이름이 아닌 번호가 찍혔기에 경찰서나 소방서의 누군가가 전화한 것으로 짐작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남편이었다. 그 시간에도 변함없이 혀는 잔뜩 말려있었다. ‘남편’이라는 발신표시가 아니었던 내 핸드폰을 정신 차리고 다시 확인해보니 남편번호의 마지막에 숫자‘0’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어디야?”
‘뭔 일 없는 거야?’대신 튀어나온 말이 그랬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란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잠깐 동안.
“아빈엄마...”
“어디냐고!!!”
전날 오후 6시, 그와 통화했었던 그 시간부터 잠에서 깼던 순간까지 두 다리 뻗지 못하고 있던 내 심정을 비꼬기라도 하듯 그는 여전히 알콜에 취한 굳은 혀를 하고 있었다. 천성으로 지니고 태어난 듯 했던 그의 술주정에 놀아나고 만 꼴이라니...약이 올랐다.
“**교회가 보이네...여긴 거기서 가까운 놀이터고...”
발끈한 내 물음에 집에서 1km쯤 떨어진 곳을 천연덕스럽게 지명했다.
“거기서 뭐하는데? 애들 잘 키우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는 왜 꺼놨는데? 그거 무슨 뜻으로 했던 말이야.”
“놀이터에 앉아 있다고... 아빈엄마...!”
“왜 자꾸만 불러? 어떡하라고?!”
“힘들다...”
질문엔 모두 답을 하지 않고 언제나처럼 자기말만 주절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지칠 것도 없을, 포기한 사람과의 대화였는데 우습게도 말 몇 마디에 피곤이 몰려들었다. 그런 내게 그가 말했다. 힘들다...?
“정말 힘들다... 그런데 억울해서 못 떠나겠더라...”
‘왜 힘드냐?’ 묻고 싶었다.‘가족 버리듯 팽개치고 살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 따지고 싶었다.‘밤새 술 퍼먹기 이제 지쳤냐?’ 비꼬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 배고파...’보채는 아이처럼 나를 불러대는 그의 지친 목소리가 내 입을 막고 있었다.
“확! 떠나려고 했는데 억울해서 못 떠나겠더라구!... 아빈엄마...”
“듣고 있으니까, 하고 싶은 얘기 다 해봐.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다~!”
‘다’억울하단다. 하긴 술주정 18번 대사 중에 하나가‘억울하다’였던 그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아버지 빨리 세상 떠난 것부터 없는 집에서 대우받지 못하고 자란 것까지 억울했던 그였으니까... 처갓집 식구들이 여전히 떠받들어주는 마누라를 대했던 날이면 꽁했던 사람처럼 그는 머지않아서 술 취해 들어와 늦은 밤 보란 듯이 박복한 늙은 시어머니께 전화를 걸곤 했다. “엄마, 뭐하요?... 아들 보고 잡소, 안보고 잡소?”묻던 대사 끝자락이 “다섯째 좀 도와주쇼. 돈 좀 있음 내 좀 주소.”로 마무리 지을라치면 내 얼굴이 어김없이 어둠속에서 화끈거리곤 했었다.
“다?”
“응... 다...”
“그게 억울해서 어디로 떠나려고 했는데 못 떠났다? 그럼 살아야겠네.”
“아빈엄마...”
<아빈엄마>라는 시조라도 읊조리듯 말끝마다 나를 칭하는 명칭이 따라붙었다.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도록. 당장 전화를 끊어버리고 배터리를 빼놓아 버릴까, 길게 이어지고 말 술주정의 마침표를 찍고 싶은 마음이 ‘아빈엄마’를 호명할 때마다 옷자락 끝을 잡고 매달리는 아이의 간절함으로 다가와 나의 쌀쌀 맞을 매정함을 가로 막고 섰다.
“술 깨고 나중에 얘기하자고. 자기 가출신고 했던 것 연락해서 취소해야 되니까.”
“알어. 문자 와있는 것 봤어... 아빈엄마...”
“왜 자꾸만 불러. 어쩌라구. 그래, 힘든 거 알겠어. 그렇게 사는 것도 쉽진 않겠지. 알았으니까 길거리에서 그러지 말고 집에 들어와서 잠깐이라도 자!”
“집에 들어오라고?! 진작 좀 그 말 하지! 나 싫다매? 나 꼴도 보기 싫다매? 그런데 지금 와서 들어오라고? 싫어. 늦었어. 조금만 더 빨리 그 말하지!”
아이처럼 울부짖으며 그가 말했다. 원하는 뭔가를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내가 쫓아내서 집을 나간 거라는 그의 말을 어찌 해석해야 되는 것인지 그 순간 잠시 먹먹했다.
“내가 나가래서 나갔다고? 그렇게 말 잘 듣는 사람이 이혼은 왜 안 해 주는 건데?”
“그렇지? 또 이혼타령이지?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당신은 쭉 그 타령만 해왔으니까...”
“아버지 없이 자란 설움이 크다는 사람이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는 자식들의 아픔은 왜 못 봐! 집에 들어오라는 말을 왜 이제 하냐고? 내가 왜 들어오라고 하길 기다려? 사춘기아이처럼 이제 조금만 불만 생기면 가출을 하시게? 내가 그 꼴까지 지켜봐야 한다는 거야? 그렇게는 못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자기는 내게 애들 아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애들 잘 키우라고? 그 넘치는 부정도 나 때문에 표현 못하고 살았나봐? 어제 저녁에 내가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미친년 널뛰듯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알어?”
“알어...미안해...”
그는 여전히 머리 좋은 사람마냥, 말 몇 마디에 ‘알어’라는 대답과 함께 예의바른 사과를 열거하고 있었다.
“나, 나와서 열심히 살았거든. 조금만 하면 뭐가 될 것 같고... 될 것 같고... 끝내 틀어지고 마는데... 난 정말 복 없는 놈인가봐...잠자는데 깨워서 미안하다... 아빈 엄마... 자라...”
생각보다 짧은 술주정이었다. 먼저 마침표를 끊어준 남편과의 통화 후, 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남편의 신변을 걱정하며 눌렀던 <112>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가출신고 취소를 요청했다.
‘죽을 사람은 조용히 죽지, 죽는다고 광고하지 않습니다...’
파출소를 나서던 내 뒤통수를 대고 말했던 경찰에게도 연락이 갔을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며 파출소 일상중의 작은 일화가 되어 그들의 우스갯소리가 몇 시간을 이어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일 후로 집주변 길거리에서 순찰차를 대하게 될 때마다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줍는 냥 내 눈은 바닥을 쓸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