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또 뭔 일이 생긴 거야? 왜 그러는 건대?”
벌써 혀가 말린 소리를 한다면 몇 시부터 술을 마셔댔다는 건지...
별거가 시작되고 더욱 가족을 등한시 했던 남편이었지만 술 취한
모습이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가던 차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노리고 있던 사람처럼, 절에 다녀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애들 잘 키워”
늘어진 카세트 녹음기 같은 목소리로 남편이 대꾸했다.
“술 마셨어?”
명백한 사실을 물었고 남편은 빤한 거짓말로 “아니!”라고 했다.
이 남자는 어쩜 숨 쉬는 것조차 거짓인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잘 키우고 있는 애들을 새삼스레 잘 키우라니,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잘 키우라고...”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어처구니없고 당황스럽던 상태로 바로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애들 잘 키우라니, 없었던
부정이 갑작스레 샘솟았을 리 만무했다. 뭔 사고를 또 저지른 것일까.
찜찜한 마음으로 가만히 있을 수만 없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꺼져있단다. 20여분 동안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기는 계속
해서 꺼져 있는 상태였다. 평소 술버릇과 달리 너무도 간단명료한
주정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뇌리 속을 떠다녔고
그럴수록 심장은 점점 거세게 벌렁거렸다. 어디 뭔 곳으로 떠날 것 같은
암시를 담은 듯 한 짧은 말...
잠깐 동안 너무도 이기적인, 벌 받을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그
렇게 해서라도 차라리 내 곁을 떠나 준다면 홀가분하겠다. 그렇다면
내가 파 놓은 무덤 벗어나지 못해 안달이 난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
그리고 꼬리처럼 따라붙는 생각... 자식들이었다. 무정하고 무책임한
사람을 그래도 아비라고, 떨어져 지내면서 어쩌다 잠깐씩 만날 때마다
애틋함을 감추지 못했던 자식들이었다. 어쩌면 벌어지게 될지도 모를
불상사 앞에서 어미가 짐작했으면서도 방관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원망하게 될까... 그리고 나 역시 증오스런 사람이지만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이 싸늘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사람을 남편이라고 확인하는 일을 덤덤히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남편의 번호만 눌러댔던 손가락으로 <112>를 눌렀다. 그리고 남편의
의미심장한 짧은 대사와 꺼져 있는 핸드폰이 불안하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위치 추적을 담당하는 것이 <119>라는 사실과 위치 추적을 하기 위해서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 마지막 통화를 했던 방경 1km 내에
기지국에서 확인이 되기 때문에 핸드폰이 꺼져 있는 상태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까지... 몰라도 될 상식을 익히게
되었다. 그리고 출동한 경찰과 함께 조서를 꾸미기 위해 타야했던
싸이카의 뒷문은 밖에서만 열 수 있다는 사실과 오후 7시가 되지 않은
시간에도 술에 취해 주정하는 진상의 인물들이 적지 않다는 것, 경찰의
조서 또한 형식에 억매였을 뿐, 살아있는 사람을 찾기 보단 시체 안치소에 서 발견될 가능성의 비중을 크게 둔다는 것까지...겪지 않아도 될 경험치를 쌓기도 했다.
1시간 이상 조서를 꾸미는 동안 묘연해진 남편이란 자의 행방을 찾지
못했고 가출자로 분류되어 전국경찰로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설명을
담당 경찰관에게 듣게 되었다. 그리고 소식을 주겠다며 귀가하라는 말에
따라 지구대 밖을 나서는데 어느 경찰의 말이 귓가를 때렸다.
“죽을 사람은 조용히 죽지, 죽는다고 광고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걱정하는 안타까운 아내의 모습으로 보였기에 위로라고 전해준
말이었을까, 아니면 그런 일 비일비재한 골치 아픈 일 중에 하나이니
그런 일 생기기 전에 오순도순 잘 살지 그랬냐는 빈정거림이었을까.
어떤 의도의 말이었건 뒤통수가 시리긴 마찬가지였다.
집으로 오기 전 남편이 기거하는 사무실에 들러보았다. 주차되어 있는
화물차와 불은 밝혀져 있지만 잠겨있는 건물 앞에서 부질없는 노크만
해대기를 몇 번. 점점 짙어가는 어둠마냥 생각마저 망연해져만 갔다.
애들이 귀가한다면 아비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할까...
한낮 술주정에 지나지 않는 일일 수도 있으니 입을 닫고 있는 것이
나을까. 근처 남편이 갈만한 술집을 돌아다니던 내내 떠나지 않던
생각들이었다. 남편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었지만
연락처를 물은 적이 없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하나같이
변변하지 못했기에 신경 쓰며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남편에 대해
파악한 것이라고는 성격뿐, 그 외에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남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형식적인 부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던 순간이었다. 찬바람이 피부에 와닿는 것보다
시린 마음에 문득 '빛 좋은 개살구'란 옛말이 떠올랐다. 맛도
모양도 별 것 아닌 때깔만 좋은 '개살구' 우리 부부를 가르치는
적절한 속담이 아닐까하는 씁쓸함과 함께... 아니, 그 마저도 자신이
없었다. 우린 때깔마저도 좋지 않은 부부였으니까. 부인 할 수 없는
그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