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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뿌린 씨앗이라고?(3) - 나도 보잘 것 없었다.


BY 솔바람소리 2010-12-07

어쩜 그는 결국 내 소원의 절반을 이뤄준 건지도 모르겠다. 두 번의 가벼운 교통사고와 여전히 곳곳에서 날아오는 압류장, 불쑥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들어 왔으며, 방금 퇴근해서 들어온 사람처럼 밥을 찾기도 했지만 집에서 자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는 밥 달라는 것만치나 불쑥 직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난 놀라거나 새삼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왕언니 대접을 받았던 직장 안에서 동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을 접하며 사람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구나, 새삼 깨달았지만 속으로 곪아가는 상처를 누구한테도 들어낼 수는 없었다. 겉모습만큼은 늘 태연하고자 애썼던 것 같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싸움과 별거, 다시 모여 살고 있지만 여전히 순탄치 않은 엄마의 삶을 가슴 아파 하던 미혼인 동료의 사연을 접했을 때나, 남편의 벌이가 변변하지 못해서 신혼 때부터 지금껏 밥벌이를 그만 둔 적 없다던, 그래서 장래 50대가 되면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겠다던 아주 소박한 꿈을 안고 있던 30대 후반의 동료의 하소연 앞에도, 속아서 결혼했고 목숨에 위협을 느껴서 갓난아이를 들쳐 메고 서울로 상경해서 숨어 살고 있다던 출산 후 붓기도 채 빠지지 않았다는 동료의 눈물 앞에서, 어린 아이 둘만 데리고 친정살이를 한다던 속내를 나만치나 들어 내지 못하던 동료의 무표정 앞에서도 난 내 과거와 현재, 미래 말고도 내 아이들의 인생까지 돌이켜야 했고 가슴 아파했지만 겉으론 남의 얘기를 접하듯 안타까워만 하던 인생 선배로 그들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난 그들에게 그저 결혼해서 지금껏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단지 아이들의 학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 위해서 세상 밖으로 나온 부러운 존재로 비춰졌나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단지 내 사연에 대해선 함구 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깜짝이벤트를 벌이기라도 하듯 간간히 차안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어주던 남편을 자상한 형부라며 부러워했다. 하나둘 텔레마케터라는 만만치 않은 여러 업무와 별별 고객을 대해야 했던 일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떠나갔고 나 역시 3개월을 버텼던 그곳에 사표를 내게 됐다. 하지만 그곳에서 맺었던 인연들이 지금껏 내겐 소중하다. 곧바로 입사했던 지역케이블방송의 전산관리팀에 입사했지만 그곳에서도 한 달을 겨우 채우고 그만두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뒤지지 않기 위해 일을 했지만 오래 견뎌내지 못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우유불박하지 못한 성격이 결코 삶에 있어 플러스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이 기도 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두 번의 연이은 직장생활 실패를 겪으며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취업할 곳이 간간히 있었지만 끊임없이 벌어지는 가정사와 직장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일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융통성 있이 견뎌 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게 자문했다. ‘너 아직 배가 덜 고픈 거니?’

나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했었다. 아이들이 인생의 전부였다. 모범이 되기 위해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왔던 삶이 한순간 무너지니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엄마는 해결사. 아이들에게 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남들 앞에서 기죽을까봐 넉넉지는 않지만 부족하지 않게 키우려 애썼던 엄마에게 바라는 것은 돈 밖에 없는 듯 했다. 무심했던 아비에게 어쩌다 만나면 몇 천원의 용돈을 바랬지만 내겐 학비며, 학원비, 교통비, 준비물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바라는 것이 많았다. 고단함에 하소연처럼 왜 엄마한테만 그런 소리하느냐고 했을 때 아들이 당당히도 말했었다.

“그럼, 얘기해도 안주는 아빠한테 말하겠어요, 힘겹지만 결국 마련해 주는 엄마한테 말하겠어요.”

휴일 쉬고 있는 엄마에게 남의 집과 비유하며 투정을 부리는 딸을 데리고 콧바람을 쏘여줘야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의 빈자리가 힘겨운 듯 핸드폰에 불이 나도록 연락해대는 딸에게도 더는 어미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욕심이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내 인생에 더한 분개를 느꼈고 더는 견뎌낼 힘을 잃었다. 처음엔 그런 상황을 만든 남편이 증오스러웠고 그의 피를 이어받아 하는 족족이 닮은, 족쇄 같은 자식들을 원망했다. 니들만 아니었다면...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증오였고 원망이었다. 그렇게 나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