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제주도청 공보실 에서 발행되는 행정신문에 객원 기자로 잠시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사실 이 홍보용 신문이란 것이 다 그렇듯 제대로 펼쳐보는 사람들이 몇 안 되는 관계로,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좀 더 효과적으로 신문지면을 제대로 읽게 하나? 하는 과제를 안고 매번 편집회의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해봤다. 타지방에 살다 제주에 와서 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제주방언이나 독특한 제주사람들의 풍습 때문에 생긴 에피소드를 찾아 실어보자는 내용이었다.
물론 원고는 내가 돌아다니며 받아오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에피소드가 의외로 많은 이들의 흥미를 끌게 되었는데, 그 중 내 손에 들어왔던 원고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간추려 소개해 볼까 한다.
제주 방언 중에 "요망지다"는 말이 있다.
표준어로 한다면 "야무지다"란 뜻의 이 말이 자칫 뭍사람들이 들을 때 "요망스럽다"는 개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는 방언이다.
결혼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다가 남편의 직장문제로 갑작스럽게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는 어느 충청도 분의 글이었다.
서울에서 얌전하게 학교를 다니며 비교적 공부도 상위권에 머무르던 두 아들딸을 이곳 ㅅ 초등학교에 전학을 시켜놓고 아무래도 학교생활적응여부가 궁금하여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면담을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아들아이 담임선생님도 그렇고 딸아이 담임선생님도 그렇고 한결같이 "애가 너무 요망 져서 걱정을 안 해도 되쿠다" 라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 엄마는 너무 당황스러워 선생님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내내 고개 숙여 "네 저희 애들이 좀 그래요. 선생님께서 잘 좀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라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두 오누이를 불러다 앉혀놓고 "도대체 너희들이 어떤 언행을 하고 다녔기에 하나같이 선생님들께서 그런 말씀을 하느냐? 며 일장 연설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뒤 한 몇 개월 지나고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게 되어서야 그 방언의 뜻을 알고 박장대소를 했다고.
무엇보다도 선생님께서 자신의 아이들에게 "요망지다."고 할 때 "네 저희 애들이 좀 그래요."라며 그 칭찬의 말을 당연한 듯 말했던 자신을 선생님들이 어떻게 생각 했을까?를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벌개 지곤 하더라는 내용이었다.
또 한사람은 제주남자와 결혼을 하고 이곳으로 신행을 와서 겪은 이야기를 적고 있었다.
서울에서 식을 올리고 제주로 내려와 시댁가족들과 며칠 지내고 난 뒤에 남편의 직장문제로 다시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막 시댁을 나섰단다. 그 때 시어머니께서 긴 골목 끝까지 따라와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하며 "혼저가라이, 혼저가." (어서가거라, 어서가.)라고 할 때 너무 섭섭해서 돌아서며 울 뻔 했다고 한다. 그 제주방언이 꼭 "혼자만 가 거 라 혼자서만 가!" 라고 하는 말 같아서.
또 어떤 이는 제주만의 독특한 풍습 때문에 겪었던 웃지 못 할 일화를 적고 있었다. 결혼 후 처음 집을 장만하고 기쁜 마음으로 이사준비를 하는데 제주도 시어머니께서 꼭 신 구간에 이사를 가야하고, 또 지금 이사 가는 방향이 남편인 자신의 아들과는 맞지가 않는 살이 낀 방향(방향이 안 맞는 관계로 그냥 이사 가면 죽거나, 불구자가 되거나,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받게 된다는 방향이란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사 하는 날엔 반드시 물이 흐르는 곳에 놓여있는 다리 위를 세 번 넘고 이사를 해야 그 살이 풀린다고 하더란다. 그 바람에 20분이면 가게 될 이삿짐 차를 무려 한 시간 반을 물이 흐르는 다리를 찾아 헤매며 새 집으로 와 이삿짐을 풀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제주사람들의 독특한 주거문화와 가족관계를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는 글을 써 주기도 했다.
아직도 제주도 농촌으로 가 보면 한 울타리 안에 소위"안 꺼리"(본채) "밖 거리"(바깥채)라는 독특한 양식의 집을 지어 살면서 장남이든 차남이든, 결혼하고 함께 한 울타리 안에 살아도 의식주 해결은 각자가 하는 독립된 삶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삶을 바라보며 처음엔 이해가 안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점차 이곳생활에 적응하며 살펴보니, 그러한 삶이 오히려 고부간의 갈등 요소가 덜 개입되어 좋은 것 같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특히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지만 경제적으로 일찌감치 독립의 기반을 터득케 하는데 좋은 점이 있는 것 같다며.
한 울타리 내 두 집 살림이지만 어려움이 있을 때는 한 가족임을 강조하고 편안한때는 서로 각 개인의 삶을 존중해 주는 모습이 더 없이 좋아 보인다는 게 그 장점 이란다.
간혹 이러한 제주도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어떤 이들은 아주 상스럽다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깊게 살펴보니 전혀 그러한 유교적 개념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었음을 터득 하였다며.
지금도 제주도 농촌지역에 사시는 노인 분들의 방언은 이곳이 고향인 나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 가만히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아주 먼 옛날 우리나라사람들이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古語가 아직도 살아 있는 곳이 이곳 제주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 한 예로 우리가 고교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용비어천가" 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된다.
"불휘 깊은 나무는 보름에 아니 묄 세 곶 됴코 여름 하노니" 란 그 글을 우리 제주학생들은 암기도 잘하고 뜻풀이도 잘 한다.
아직도 제주에선 "바람"을 "보름"이라 발음하고, "열매"를 "여름"이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