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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김 선생님


BY 휘림 2007-10-21

우리 동네 김 선생님 수필부문

2007/06/28 12:55

http://blog.naver.com/chaaesoon1/40039210131

 환갑이 가까워 오도록 꼿꼿한 등과 서늘한 눈매, 단정하고 우아한 옷매무새 하며 어디를 봐도 결코 만만해보이지 않은 우리 동네 김 선생님.

 이름만 대면 제주에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김 선생님에게 몇 년 전 자식과도 같은 멍멍이가 둘이 있었다. 한 녀석의 이름은 처음부터 내 기억에 삽입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가끔  딸아이들의 이름까지 헛갈리는 기억을 갖고도 나는 다른 한 녀석의 이름은 4년이 지난 오늘까지 잘 기억하고 있다.

 바로 “농땡이”라는 다소 황당한 이름 때문에.

 김 선생님께서 왜 그 녀석을 농땡이라 지어 불렀는지 여태 수십 번을 길에서 마주쳐도 물어보지 않았다. 허나 김 선생님의 그러한 작명 뒤엔 녀석과 함께 지내며 특유의 성격을 제대로 간파해냈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갖고 있다.

 가녀리고 핏기도 없는, 김 선생님 스스로도 입술에 구지베니(립스틱)안 바르고 앉아 있으면 어디 아픈 줄 알고 모든 사람들이 더없이 깊은 배려를 해준다는 모습의 주인과 함께 다니면서도 엄청나게 까부는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하루 일과는, 김 선생님이 출근하고 나면 하루 종일 마당이고 옥상이고 집안이고를 가리지 않고 뛰어 놀다가 죄지은 일도 없이 지나가는 선량한 사람들을 향해 냅다 짖어대는 일이다. 게다가 김 선생님께서 일찍 퇴근하고 돌아온 날이면 동네를 산책하러 나오곤 하는데,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하는 사람들의 발등을 사정없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생명 없는 신발까지도 세상을 버리고 싶다 할 만큼 못살게 굴곤 했다.

 우리 집 딸들은 “개”라는 단어만 나와도 무서워서 사족을 못 쓰는데, 그러한 약점을 들추어낸 농땡이가 긴 혓바닥에 침을 흘려가며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고 놀이하듯 짖고 까불며 공포에 떨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의 다리사이에서 두려움으로 몸을 떨다가 김 선생님의 저지로 간신히 농땡이에게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면, 딸아이들은 이마와 등에 촉촉한 습기가 번져 있곤 했다.

 게다가 발정기 때엔 며칠씩 집을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며 김 선생님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고, 어쩌다 시간대가 맞아 김 선생님 부엌에서 우아하게 차라도 한잔 마시려고 하면 그 특유의 체모를 휘날리며 누린내를 풍겼다.

 사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에이그 저 천하의 난봉꾼을 누가 안 잡아가나?” 하며 속으로 주먹질을 한 적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 딱 이맘 때 쯤 이라 여겨진다. 휴일이라 TV를 보며 빈둥거리던 남편이 국수가 먹고 싶다 길래 그 국수를 사기위해 동네 슈퍼로 향하고 있었다. 헌데 학교 울타리 나무그늘 밑에 외롭게 앉아 뭔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시름에 잠겨 있는 김 선생님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걸음을 옮겨보니 김 선생님의 발밑에 농땡이가 길게 다리를 뻗고 누워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여쭈어 보니 농땡이가 며칠 전부터 그렇게 잘 먹고 잘 놀던 일을 게을리 하더니 오늘에서야 그게 심장사상충 때문인 걸 알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의 심장에 사상충이란 해충이 기생하며  점차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다가 끝내, 개의 심장내 모든 혈관을 막고 죽게 하는 무서운 蟲이다.

 개의 사상충 숙주는 모기인데, 여름이 다가오면 사상충 예방접종을 해야 하지만 여태껏 잘 지내오던 농땡이라 방심하던 차에 그리 되었다며 김 선생님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에서인지 죽어가는 농땡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더니 다음 말을 덧붙였다.

 “사실은 지난 음력사월 초에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이 찾아왔었거든.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나하고 아들 등 값을 건네주며 초파일에 절에 가거들랑 등 좀 켜달라고 부탁했지. 막 그이가 돈을 받고 나가는 순간에 내가 농땡이를 생각한 거야. 그래서 다시 농땡이 등 값까지 건네주면서 우리가족등과 나란히 달아주라고 부탁했었지. 지금은 개로 태어나 살고 있지만 다음 생엔 꼭 사람으로 태어나길 염원하면서 말이야. 그 효과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던 거야.”

 그 말을 듣고 나 역시 그날 김 선생님의 바람대로 농땡이가 초파일에 켜준 등으로 인해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길 간절히 염원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위해 그렇게 서둘러 떠났기를 바라면서.

 허나 김 선생님의 개 작명 얘기는 또 한건이 남아있다. 선생님이 제주도청 문화재관련 부서에 재직할 당시, 그곳에 떠돌이 개가 들어와 새끼를 세 마리나 낳았었다.

 하얗고 늘씬하게 잘 뻗은 그 개의 이름을 김 선생님께선 “허튼 백작부인”이라 지었다. 몸과 얼굴은 정말 개 종족으로 치면 백작 부인에 버금갈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영 아니라는 의미의 작명이었다. 제가 낳아놓은 새끼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으면서 우아하게 목을 빼고 먼 하늘만 쳐다보는 모양새가 딱 그 이름에 들어맞는 개였다.

 자기거처도 아닌 곳에서 해산(?)한 것도 그렇지만, 어미로서의 의무감도, 최소한의 애정도 보이지 않던 “허튼 백작부인”이었음에.

 당시 김 선생님은 집에서 돼지뼈다귀를 고아 들통에 담아 나르며 그 “허튼 백작부인”의 젖을 나오게 하느라 온 정성을 다하곤 했었다. 끝내 해산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니까 이름처럼 "허튼 백작부인"이 되어 정처 없이 떠나 가 버렸다.

 세 마리의 허튼 백작부인 소생 남매들은 김 선생님의 주선 하에 뿔뿔이 헤어져 개사모(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회원의 집으로 입양되어 갔다.

 나는 그때도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앞으로는 개 이름을 “성실이”나 “貞淑이” 혹은 “조신한 부인” 등으로 지었으면 좋겠다고.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동네 김 선생님은 예전“농땡이”와 비슷한 애완견을 기르고 있다. 가끔 길에서 마주치기도 하는데, 나는 차마 그 이름을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 이번에도 또 “난봉이”거나 “자유부인”혹은“건달이” 같은 이름으로 지어 부르는 것은 아닌가 하고.

 김 선생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다간 개 들은 하나같이 작명해준 그대로의 이름처럼 살다 갔기에 말이다.

 늦은 밤 우리 집 창밑을 지나시다 열두시 이전에 불이 꺼져 있으면 “애순씨는 안 되겠어.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어려운 세상인데, 하물며 열두시 전에 잠자리에 들어서야 어디 무슨 일이건 이룰 수가 있겠어요?” 라며 따끔한 충고를 하시던 우리 동네 김 선생님.

 혹 내 이름을 속으로 “농땡이”로 부르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07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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