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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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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미학


BY 최지인 2006-03-06


살면서 사람들은 참 많은 것에 '미학'이란 말을 붙이고 싶어한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비웃을지라도 단 한번 미학을 명명하라면

단연코 '부지깽이 미학'을 들고 싶다.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들을 길러낸 건 바로 엄마의 일부분이었던

아니, 엄마의 분신같았던 그 부지깽이였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에서다.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마음과는 달리 하루에도 몇 번씩 매를 들어야 할

상황이 발생하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내 가슴을 후려치는 말이 있다.

"이것아, 너도 나중에 니하고 똑같은 자식 한 번 낳아서 길러봐라. 이 에미 마음이 짚힐테니....."

그럴 때는 등짝 어느 한 곳을 오지게 한 대 맞은 듯 나도 모르게 화들짝 등 뒤로 손이 간다.

.

고등학교 이학년.

그리 짧지 않은 내 생에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과

엄마를 엄마이기 이전에 추운 마음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가정에 대한 남다른 여자로서의 애착을 동시에 깨달았던 때다.

그 시절, 하필이면 그 시점에 전국적으로 학교장 재량에 따른 두발 및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다.

우리 학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충실히 시행하게 되었다.

교복만 깨끗이 빨아서 다려 입으면 용모를 제외하곤 서로가 별반 달라 보일 게 없었던 우리들에게

복장 자율화가 미친 파장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했던 시기에 나는 그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었나 보다.

모든 면에서 나와 선의의 경쟁과 비교가 되던 급우가 날마다 갈아입고 오는 옷차림이 유난히

신경 쓰이던 어느 여름날, 별것도 아닌 것을 트집 잡아 그 애와 다투다 선생님께 불려가

왜 너답지 않은 행동을 하냐며 심하게 꾸중을 들은 날.

죄 없는 신작로에 있는 힘껏 신발을 툭툭거려 뽀얀 먼지를 발등에 쌓으며 집에 왔었던가.

엄마는 저 만치 집 앞 밭이랑에 난 풀을 매느라 머릿수건 질끈 동여맨 등을 보이고

맨발로 고랑을 더듬고 계셨다.

씨근대며 다가가 고개를 외로 돌리고 퉁명스레 말을 건넸다.

"엄마, 나 돈 좀 줘".

"갑자기 돈은 무슨 돈, 뭐하게? 지금 돈 없다"

"아이, 참.....응, 엄마 나 옷 사 입게 돈 좀 줘".

"야가 시방 뭐라 하나 응? 엄만 돈 없다. 먹고 죽을래도 돈이라고는

씨가 말랐다. 들어가 어여 숙제나 해라".

그리고는 묵묵히 다시 열심히 호미 질만 하는 엄마의 완강한 등.

한낮 땡볕은 사람을 더 질기게 만드는가.

엄마 등을 따라가며 무턱대고 계속 졸랐더니

저만치 호미를 휙 던지고는 벌떡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속이 타시는지 부엌으로 들어가 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셨다.

그때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나의 그 못된 고집은

결국 엄마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멍울을 만들고야 말았다.

부엌까지 종종거리며 쫓아가서 매달려도 들은 척도 않는 엄마가 너무도 야속해서

"돈 달란 말이야. 나도 다른 애들처럼 예쁜 옷 사 입고 싶단 말이야.

제대로 입히지도 못할 거면서 그러면 뭐 하러 나 낳았어.

왜, 왜, 엄마 미워, 속상하고 원망스럽단 말이야".

순간, 엄마가 부엌 한 구석에 세워져 있던 부지깽이를 후딱 집어 들더니

무작스럽게 내 등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래, 이것아. 그게 니가 이 에미 한테 할 말이냐. 그래도 엄만 못 배운 한 때문에 느들 공부만큼은

어떡하든 마저 마쳐줄라고 이래 몸부림을 치는데 니가 이 엄마한테 그기 할 말이냐. 응?

옷이 밥을 멕여 주드너, 공부를 갈차 주드너 엉?"

처음이었다. 엄마한테 그리 혼쭐나게 맞은 것도, 그리 호된 야단을 맞은 것도.

무조건 뒷산으로 튀었다.

뒷산 묏 등가 잔디에 풀썩 엎디어 마냥 울었다.

처음엔 엄마가 미워서 울었고, 다음엔 가난한 우리 집이 서러워 울다가 나중엔 그렇게 모질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 엄마의 아픈 마음이 짚혀 미안함에 다시금 쪼그리고 앉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산소에 내려앉는 저녁안개가 무서움을 불러와 쫓기듯 일어나 눈물로 뻑뻑해진 얼굴을 문지르며

부엌 뒷문을 살짝 여니 거기, '탁탁'거리는 아궁이 속 불길에 처연한 눈길을 던진 엄마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잘못했다고 빌어야겠는데 엄마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자신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잘못했으니 맞아도 싸지 또 때리면 나 죽었소 맞으리라'는

심정으로 엄마 곁에 슬며시 앉다가 엄마의 한 쪽 손에 쥔 부지깽이가

흥건히 젖었다 불길에 얼룩을 지우며 말라가는 것을 결국은 보아버리고 말았다.

아, 울 엄마는 얼마나 많은 부지깽이를 적시고 또 말렸을까.


그랬다...

엄마는 당신의 고단한 삶을 그을음 이는 까만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아

괜한 부지깽이만 휘둘러 불길 속으로 긴 한숨과 함께 날려버리곤 다시 세상을 살아낼

힘을 얻기도 하고 그 부지깽이를 의지 삼아 하루하루를 풀어내셨던 것이다.

어쩌면 그 부지깽이는 엄마에겐 살아냄의 또 다른 흔적이자, 용기를 위한 주술 같은 거였는지도 모른다.

옆에 앉아 쭈뼛거리는 못난 딸에게 엄마는 나직하게 그러셨다.

"이것아, 니도 시집가서 니랑 똑 닮은 딸내미 하나만 키워 봐라.

그러면 이 에미 마음 알게 될 테니.....".

그러면서 꼭꼭 혼자서만 간직하신 당신의 추운 시절을 털어 놓으셨다.

세살 때 친 어머니를 여의고 새 어머니의 구박 속에서 정에 굶주려 살다

열 아홉에 시집오신 엄마는 당신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오래오래 살아서

내 새끼들만은 정도, 사랑도 듬뿍 주고 당신은 뼛가루가 부서져도 내 새끼들에겐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고...

그런데 마음먹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 게 세상살이더라고 푸념하셨다.

가슴이 뻐근하고 귀도 먹먹한데 내가 한 말은 고작

" 엄마, 부지깽이 다 타들어 간다. 얼른 물에 담가라".였다


겨울이면 아버지가 소나무 등걸이나 삭정이를 부지런히 해다 집 뒤에 가리를 쌓았는데 엄마는

적당한 굵기에 길고 곧은 줄기만 보이면 매끈하게 다듬어서 늘 여분의 부지깽이를 마련해

잘 살고 싶다는 소망과 열망으로 신념처럼 부엌 한쪽에 꼿꼿하게 세워 놓았다.

때로는 그 부지깽이가 우리를 혼내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몽둥이로 둔갑하기도 하고,

헝겊을 둥그렇게 말아서 부엌 천장에 낀 그을음을 걷어내는 용도로 쓰이기도 하고,

지붕 위에 올라가 말썽 피우는 닭을 내려오게도,

마당에 깐 멍석의 먼지를 두드려 터는 용구로 쓰이기도 했지만

단하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꼭 한 구석에 꼿꼿하게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지깽이가 꼿꼿하게 세워져 정돈이 돼 있어야 집안이 바로 선다'는 그 옛말을

신앙처럼 믿어야 할만큼 엄마의 가족에 대한 소망은 거의 절대적인 신앙처럼 간절했기 때문이리라.


2년 전에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한 오빠가 반 강제로 두 노인네를 모셔갔지만 한 평생을

문명과는 담을 쌓고 살아오신 두 분은 2달을 겨우 채우고 도망치듯 옛집에 다시 내려오셨다.

이젠 두 노인네가 부지깽이로 불길 다독이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그 마른 잎맥같은

버석 버석한 손을 서로 비벼가며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의 향기를 피워낸다.

내겐 그 모습이 어떤 아름다운 풍경보다도 숭고한, '절제된 미학'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