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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BY 김정인 2005-07-24

남편 책장에 꽂힌 낡은 책 한권이 눈에 띄였다.

내가 어릴적 책을 읽으며 운 적이 딱 2번이 있는데, 첫번째는 초등 5학년쯤 이었던가. 추운 겨울밤 배깔고 누워 읽은 플런더스의 개였고, 두번째가 이번에 다시 읽은 이 책이었다.

요즈음 아이들의 시각을 빌어 세상을 보고자 하는 작품들이 많다. 최근에 읽은 것으로 은희경의 '새의 선물'라는 작품이었는데 아주 세밀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왠지 어린이다운 순수함이 느껴지지 않아 조금은 어색한 느낌이 들었는데, 제제는 달랐다. 뽀르뚜까에게 쉴새없이 조잘되는 제제의 말 중에는 다섯살 어린이의 상상의 세계와 그 눈으로 보는 현실의 세계가 잘 짜여진 옷감의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져 거부감없이 내 마음에 녹아들었다. 어떤 말은 명랑만화를 읽는 것처럼 깔깔깔 배를 잡고 웃게 만들었고, 어떤 말은 몸서리쳐지는 인생의 슬픔을 말하기에 눈물을 짓게 했다.

특히, 여섯살 아이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인생에 있어 슬픔이란 우리가 이성을 갖게 되고, 인생의 양면성을 발견함으로써 동심의 세계를 떠나는 그 순간에 느끼게 되는 것'이라는역자의 말이 마음에 꽂혔다. 이 때까지 내가 아들에게 자신있게 명령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른의 사고가 인생을 먼저 살았기에 아이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렇게 아이들보다 월등하다고 여기는 어른의 표정을 보면 슬플 때가 많다. 그러나 아이들의 표정은 얼마나 천진난만한가. 어쩌면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휠씬 인생을 인생답게 살고 있는지도.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 같으면 앞으로 나와도 된다고 했던가.

 

이 책을 읽으며 또 하나 내 마음을 잡아두는 사람은 그렇게 꽉꽉 막힌 삶의 어두운 골목에서 제제에게 한줄기 빛이 되어준 뽀르뚜까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제제를 향해 장난꾸러기로 낙인찍고 심지어는 악마새끼라고 할 때 그는 '천사'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 제제를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은 1학년 담임선생님, 거리에서 악보를 파는 아리오발도, 글로오디아 누나, 엄마, 뽀르뚜까 그리고 라임 오렌지나무였다. 그 중에서 항상 가까이에서 자주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대화를 나눈 이는 뽀르뚜까였다.
상담이론 중에 Melanie Klein등이 주장했던 '대상관계이론'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만나게 되는 첫번째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가 이후의 개인의 건강한 발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제제가 훗날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뽀르뚜까가 준 짧지만 진한 사랑을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가까이에서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고 사랑하며 대화로 마음을 나눗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 분은 엄마였고, 하나님이었다. 제제의 엄마처럼 우리 엄마도 먹고 살기가 바빠 물질적인 지원은 해 주셨지만, 정서적인 지원은 해 주지 못하셨다. 언제나 가슴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 구멍을 교회에 가 기도하며 위로를 받았다. 오늘밤에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에게 라임오렌지 나무가 되어 주셨던 분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제제와 비슷한 나의 어린 시절이 서러워서 울었고, 두번째 읽는 지금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그리워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