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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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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BY 김정인 2005-07-03

어제까지 비가 지짐거리더니, 오늘은 아예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줄줄 흘러 내린다. 몸부터 그것을 알았는지, 김치를 담구어 보겠다고 설치던 금요일부터 피곤이 온 몸을 뒤덮더니 토요일부터는 목이 침을 삼키면 거북할 정도로 아프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장마는 조금씩 조금씩 몸집을 무너뜨리더니, 마침내는 마음에까지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고 울고 있는 엄마 옆에서 아이는 여전히 자기가 마음에 드는 바지를 골라서는 한 바지가랑이에 양다리를 넣어 안 입혀진다고 바둥거리고 있다. 쉴 새없이 변하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새벽부터 아이는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엄마도 그런 아이를 따라 종종걸음이다. 엄마의 욕구나 기대는 깡그리 무시된 채 아이만 따라 다녀야 하는 이런 상황이 무척이나 힘겹다.

또 몇 줄을 더 쓸 수 있을까. 임시방편으로 쥐여준 연필꽂이의 모든 필기구들은 온 방에 흩어져 있고, 그 위에 오줌을 싼 채로 아이가 운다. 다시 마음을 멈추어야 한다.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까의 낭떠러지 끝에 있던 감정은 아쉬운 따나 겨우 낭떨어지 곁 나뭇가지에 동여매 놓았다.

문득, 상담실에 왔던 아줌마가 생각이 난다. 얼굴엔 힘이 없어 보였지만 말하는 자세에서는 꽤 인태리한 느낌이 물신 풍겼다. 오래 전 일이라 자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욧점은 이랬다.
자기에게는 너무 예쁜 4살난 딸이 있고, 성실하고 자상한 남편, 맘좋은 시어른들, 남이 보면 아무런 문제없는 가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있는 자신은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이 들고 밥맛도 없고 너무나 불행하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얘기를 할라손치면 '대체 뭐가 문젠냐. 돈 잘 벌어죠, 아이 잘 커죠, 시댁이 애 안 먹여,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당신은 왜 그러냐'고.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중에 상담을 쭉 해 가면서 아줌마는 자신은 자아가 강한 사람같다는 것이다. 남편의 것, 자식의 것,시댁의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신의 영역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 움직여야만이 살 수 있는 사람. 이런 느낌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 자아가 강한 사람이다.
물론, 누구나 이런 느낌은 가지고 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남편의 지위와 내 것을 동일시하며 만족해하며 살아가고, 내 것이 조금 부족해도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떨며 충분히 잊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희생하며 기꺼이 자식들을 위해 살아가도 견딜만한 사람도 있고, 술이나 노래, 도박등으로 회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은 나를 표현할 만한 자타가 인정할 만치 그럴듯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만족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걸 자아실현이라고 하던가. 어떤 식으든 내 것이 표현되어지고 존중 받아져야 직성이 풀리는 류이다. 나는 나일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거나 보상될 수 없는.

아, 내가 생각해도 피곤하다. 이젠 그만두고 싶다. 이제 대충 그런 것 추구하지 않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살고 싶다.
나는 이 15개월의 골짜기에서 죽을 것 같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사람들은 쉬운 소리로 아이 다 키워놓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극히 주관적인 나의 한계수위가 휜히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에서 떠내려가는 가재도구며 농작물을 바라보는 수재민마냥 막막하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