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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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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땡겨오기


BY 김정인 2005-03-21

 

비가 내린다. 봄비라면 분위기 있게 솔솔 내릴 양이지 봄비도 아닌 것이, 무거운 겨울비도 아닌 것이 뚝 두둑 뚜욱하며 내린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줌마라면 으례 밖에 널어놓은 빨래를 걱정할 일이지만,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된 요즈음은 그럴 걱정은 없다.

요란스럽게 풍선의 모양을 짓틀어 만드는 문화강좌를 하나듣고 들어오니 진이 다 빠진다. 밖에 내리는 비가 왠지 짜증스럽게 다가오면서 우울해진다.

느닷없이 찾아온 우울이라는 놈을 쫓아낼 요량으로 자는 아이 옆에 벌러덩 누웠다. 기분이 별로 좋아지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는 아이에게 장난을 걸며 이리저리 방을 뛰어다니다가 보니 유난히 예쁜 분홍색 쪽지가 눈에 띄였다. 며칠 전 도서관에 갔다가 챙겨 온 가족음악회 광고 팜플렛이었다.

음악회!!!
음악의 '음'자도 모르지만, 우울한 내 기분을 달래는 데는 이게 안성맞춤일거야. 하지만 그 순간 높다란 산이 하나둘 마음을 가로막았다.

첫번째 산은 아이들. 첫째야 데리고 간다지만, 둘째는 어쩌지? 13개월된 아이를 데리고 음악회라. 지나가는 개도 웃겠다.얼굴에 철판깔고 떼어놓고 가자. 아빠에게. 과연 남편이 승낙할까?

두번째 산은 남편. 어제 회사에서 손님 대접하느라 새벽에 들어와 피곤할 텐데. 미안하지만 그래도 얘기해 보자. 말로 할 자신이 없어 조심스럽게 문자 날렸다. 답이 안 온다.

아이을 임신할 때부터 영화나 음악회등 문화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문화'라고 하면 돈 많은 사람, 여유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려니했다.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기엔, 갈수록 빠듯한 현실은 내 목을 죄어와 숨통이 턱턱 막혔다. 나는 그 숨통을 트는 수단으로 문화를 선택했다.

손쉽게 대하는 책은 물론 음악회, 전시회, 영화 등등 여유를 부리며 즐기며 인생을 살기로 했다. 아등바등해도 어차피 죽는 순간에 보면 모든 인간은 다 똑같을 것인데. 기회가 되는대로 마음의 봄을 억지로라도 만들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래도 요즈음은 시절이 좋다. 어느정도 몰 만한 오페라나 뮤지컬은 입장료가 10만원 정도이고, 유명 가수의 콘서트는 4-6만원 사이라서 돈없는 사람은 엄두도 못낼 판인데, 곳곳에 공짜로 하는 음악회나 전람회도 많으니. 이번에 도서관에서 하는 음악회도 그 중의 하나로 지방의 오케스트라가 와서 연주를 한다고 한다.

거의 마음을 접고 저녁준비를 하고 있는데 ,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음악회 간다고?"

"응, 아이가 악기 연주하는 것 잘 못 봤는데 그것도 좀 보여주고 갔다올라고"

괜시리 아이까지 들먹이며 꼭 가야 한다는 뜻을 은근히 전했다.

"지금 간다"

30분도 안 남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나는 하던 저녁준비도 후다닥 마무리하고 아이 옷 입혀서 나왔다.

야호! 이게 얼마만의 자유인가! 두 개의 큰 산을 넘고 나온 오늘의 화려한 외출은 둘째 아이때문에 항상 찬밥신세였던 큰 아이와 호젓한 시간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두런두런 얘기도 하고, 뜀박질도 하고, 잡기놀이도 하면서 한코스 남짓한 거리를 즐겁게 걸어갔다.

공연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이리기웃 저리기웃하다가 우리는 하는 수 없이 2층의 계단에 걸쳐 앉았다. 무대에는 악기를 든 연주자와 지휘자 그리고 구연동화를 하는 진행자가 서 있었다.

첫 연주는 러시아의 작곡가 프로코피에프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작곡한 '피터와 늑대'라는 음악동화였다. 스크린에는 그림책이 나오고, 중간중간 진행자가 그 장면을 동화로 읽어주고, 그것을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했다. 음악동화라는 형식이었는데, 처음 접해 보아 생소했지만 장면에서 느껴지는 것을 말이 아닌 음악으로 그렇게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랬다.

피터와 새, 고양이가 숲 속에서 자유롭게 노닐 때의 바이올린의 현이 자아내는 사뿐사뿐하고 통통 뛰는 듯한 연주, 늑대가 오리를 잡아 먹을 때의 북의 급박한 두드림, 새가 늑대의 머리를 쪼기 위해 다가갈 떄의 조심스럽고도 날센 움직임을 표현한 젤로의 간들거리면서도 공기를 찢는 울림은 보지 않고도 충분히 이야기의 진행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소년,소녀 합창단의 예쁜 목소리는 세상에 탁해진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줄 만큼 맑았다.

어른들을 위한 드라마 주제곡에서는 여름향기, 겨울동화,겨울연가와 같은 서정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건만, 내 귀에는 세상에 찌든 애닯고도 슬픈 내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 눈시울이 살며시 젖어들었다.

이래서 음악을 듣는구나.

이어서 연주된 만화스크린과 함께 만화 주제가가 흘러나오니 아이들은 연신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하고 따라하기도 했다. 엄마는 감동에 겨워 음악에 파묻혀 있는데, 아들은 일어서면 자동으로 접히는 의자의 위에 높다랗게 앉아있다가 미끄러져 의자를 펴는 놀이를 하더니 결국은 잠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의 별을 보며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오랜만에 마음으로 웃어본다. 둘째가 내내 울어 짜증을 내는 남편을 보아도, 밤늦게까지 미처 못했던 설거지며 집안 일을 하면서도, 그 밤 늦도록 아이가 보채도 내 마음엔 여전히 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살기가 가팔라 초록빛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던 나의 삶의 언덕에도 억지로 데리고 온 봄 때문에 때 아닌 나비가 날아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