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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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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속의 1970년대


BY 하나 2004-11-29

회사 언니가 한소리 한다, 지금이 어느땐데 김장을 120포기나 하느냐고...

5년전에도 3년전에도 작년에도 올해도 우리 시댁은 김장을 100포기 이상했다, 늘.

 큰집은 큰집대로, 딸네집은 딸네집대로, 작은집은 작은집대로 김장을 해서 올해만 다섯번을 했노라고, 그래서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힘들다고 푸념섞인 자식자랑을 하시는 앞집 할머니, 덕분에 조카딸한테 옷도 한벌 얻어 입고 김장철내내 맛난 것만 먹고 다니셨다는  자랑까지 잊지 않으시는 앞집 할머니다.

하지만, 우리 시댁은 따로따로 하지 않는다. 따로란게 없다.

다들 근처에 살기도 하거니와 어머님 성격에 그리고, 형님 큰 손에 일거리가 남아있을리 없다. 한번에 배추 사서 다듬고, 절이고, 씻고, 김치속 만들고, 버무리고, 집집마다에 널려있는 김치통 모두 거두어서 김치담고, 그래야 마음을 턱 놓으시는 분들이다.

출근길, 마당 한 켠에 일렬로 가지런히 쌓여있는 시퍼런 배추들을 보면서 맘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올해는 배추통이 좀 작았으면 하는 주부답지 않은, 우리 어머님이 들으시면 큰일날 바램을 가져본다. 작년엔 배추가 너무 잘 된 탓에 머리통보다도 훨씬 큰 배추포기 나르느라, 그거 다듬어내느라 무진 애를 썼었다. 날씨까지 추워서 손이 곱도록 배추를 다듬었는데, 이런, 올해는 날씨까지 화창하구나.

 이 동네에선 우리 시댁이 제일 마지막으로 김장을 하게 되었다.

처음 시작한 집은 느긋하니 김장을 끝냈는데, 그 다음부턴  너도나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큰일나는 것처럼 온동네가 한바탕 몸살을 앓았다. 아기 보느라 꼼짝도 못하고 이웃집에 품앗이도 못해주시고 집에 계셨던 우리 어머니 맘 속으로 조급증이 나셨던 모양이다. 올 겨울은 따뜻하다니까 김장 좀 늦게 할거라는 평소의 말씀은 어디로 가셨는지 원, 배추를 받자마자 바로 김장준비를 하셨다.

멥쌀로 풀을 두통이나 쑤고, 마늘 다듬어 찧어놓고, 옥상의 파 뽑아서 다듬어놓고, 소금 잔뜩 준비해놓고, 갓 씻어놓고....젊은 사람이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아기 데리고 참 많이도 하셨다. 우리가 토요일에 할테니 그냥 두시라고 한사코 말려도 소용없는 일.

동네 아줌마들의 품앗이로 양념 준비는 다 끝이 나 있었다.

토요일에 배추 다듬고 오후 늦게 절이기 시작했다.

큰 다라에 소금물을 풀고 반으로 가른 배추를 헹구어 내고 그걸 다시 큰 들통에 차곡차곡 소금 사이사이 뿌려가며 절인다. 안마당에 쌓인 통배추가 줄어들 줄 모른다. 이제나 저네나 배추 갯수만 세고 있다, 나는...

다 절이고 나니 큰 통으로 세 통이요, 작은 통으로 두개라...내일 김치 속 넣을 일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오늘따라 꼬맹이는  잘도 논다. 이런날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악을 쓰며 운다던지 해야 내가 그 덕 좀 볼 텐데, 요녀석 신발 신고 옆에서 알짱알짱 뭐가 좋은지 싱긋싱긋 웃으면서 놀기 바쁘다. 절인 배추를 덮어놓고 저녁준비를 한다. 에구, 허리야.

밥상 치우기 바쁘게 낮에 씻어둔 무를 마루로 옮긴다.  큰 다라 세개에 가득 채를 썰었다. 오른 팔이 저리고 아프다.

버무리는 것도 장난 아니네. 고추가루, 물엿, 쌀풀, 마늘, 생새우, 새우젓, 멸치액젓,파, 갓, 통깨, 생강가루 골고루 놓고 버무리는데 한번 뒤집기도 힘들다. 세통이나 되다보니 행여 빠진 재료 있을까 싶어 몇번이고 맛을 본다. 한참을 치댄 후에야 제법 빨간 빛이 무를 점령한다. 이제 마당으로 옮겨서 사람 다닐 길을 내주어야한다. 세통을 두통으로 줄이고 셋이서 같이 통 하나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어휴, 무겁다 무거워.

오늘 같은 날은 다들 일찍 퇴근하면 좋으련만, 토요일인데도 우리 남편 밤 10시에 집에 온다. 그 시간까지 쉬지도 못하고 기다렸다가 밥상을 차릴려니 슬며시 짜증이 난다.

마지막 밥상을 치우고 설거지 마치고 나니 밤 10시 30분. 이제 집에 가서 서둘러 자야한다.

그런데, 빨래통에 담긴 빨래들이 내 맘을 잡는다.  찌든때엔 바르는 세제를 바르고, 세탁기에 몰아 넣고 불린다. 그렇게 빨래 돌리다가 잠이 들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빨래를 헹구고, 급하게 밟아서 구김을 좀 없앤 후 빨래를 서둘러 널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인다. 작은 놈 업고 급히 시댁으로 갔다.

성격급한 동네 아줌마들이 벌써부터 마루에 자리를 차고 앉았다.

본격적인 김치 속 넣기가 시작되었다. 어머님은 김장철 내내 한번도 품앗이를 가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아줌마들이 네분이나 오셨다. 형님들이랑 아줌마들이랑 김치 속을 넣고, 나는 마당에 앉아 헹구어낸 배추 밑둥을 칼로 정교하게 도려내고, 손으로 물기를 꼭꼭 눌러 짠다. 김치 속을 마루로 날라주고, 김치통에 김치가 다 차면 소금 훌훌 뿌리고 아까 준비해둔 배추이파리 덮고 얼른 뚜껑덮어서 김치냉장고로 옮긴다. 속 넣기가 끝나는 걸 보자마자 빈 그릇들을 내다가 후다닥 닦아서 햇볕 비치는 마당가로 세워놓는다. 마당에 널린 배추조각들도 쓸어담고...휴, 심부름도 힘들다는 거 아실까?

점심은 동태찌게다. 어제 채썰다가 남은 무토막들이랑 동태 가득 넣고 뻘겋게 양념해서 푹 끓여내니 시원한 찌게 완성이요...햅쌀에 햇콩 넣고 밥을 고슬고슬 짓고, 오늘 버무린 김치 겉저리에 총각김치 내니 밥 한공기 뚝딱.

이렇게 여러 일손의 도움으로 올해는 점심전에 김장이 끝났다.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 마시는 커피 한잔, 그 끝내주는 깊은 맛을 알까?

며느리들 수고했다며 어머님께서 목욕비를 내신단다. 어머님 모시고, 며느리 셋이서 같이 목욕을 간다. 개운하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님이 낯선 집 문을 열고 누구를 부르신다.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엄마없이 사는 애들이라시며 김치 나눠줄테니 김치통 가지고 오라고 하셨단다.

애써서 한 김치를 어머님은 혼자 사시는 노인분들과 이웃 아줌마들과 엄마 없이 사는 아이들에게 펑펑 나눠주신다. 어머님만의 품앗이다.

지금은 2004년이다.

해를 거듭할 수록 숫자는 더 올라갈테지만 우리집 식구들은 늘 1970년대식으로 살아갈 듯 하다.  김장을 많이해서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넉넉하게 나눠주시는 어머님의 따스한 인심이 살아있는 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