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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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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박 하나 들고


BY 하나 2004-09-15

매니큐어를 바르지 않는다.

못생긴 손톱이 더 도드라져 보이므로.

화장대 구석엔 아세톤이 있다.

길거리에서 하나에 천원한다기에 사둔 것인데 벌써 몇해가 흘렀다.

언젠가는 나도 매니큐어 바를 일이 있을지 모르므로.

하지만 정작 매니큐어는 사지 않는다.

뚜껑을  열면 박하사탕 먹을 때 처럼 화한 느낌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처음엔 신선하기까지 하지만, 이내 코를 강렬하게 찌르기 때문에 그 아픔에 짐짓 놀라

코를 감싸쥐게 된다.

 

지하상가는 벌써 두달이 넘도록 어지럽다.

낡아서 새롭게 공사를 한단다.

골조만 남기고 다 뜯어내니 어둠 속에서 흉가처럼 음습하고 쾌쾌한 모습을 드러낸다.

지하상가로 내려간 나, 갑자기 길을 잃어버린다. 기둥만 늘어서 있는 길 속에서 헤맨다.

상점들이 빼곡하게 불을 켜고 소리를 내지를때는 그 불빛을 등대삼아 굽이굽이 잘도 다녔는데, 시끄러운 등대가 없어지고 나니 길을 잃는다.

천장 속이 이렇게 복잡했었나? 온갖 전기선들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저렇게 많은 뭉텅이 속에서 어떻게 필요한 걸 찾을 수 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대형 선풍기가 등장한다. 쾌쾌한 냄새를 내보내기 위한 건가?

곳곳에 모래무덤이 쌓인다, 시멘트도 쌓인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간다.

어느 순간 벽돌 쌓는 모습이 보인다.

며칠 후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개는 모습이 보인다.

또 며칠 후 말끔하게 회색으로 칠해진 벽들이 드러난다.

두어달이 지난 지금 회색벽엔 하얀 페인트칠이 되어 곧 마무리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이제 쾌쾌한 냄새는 사라졌다

대신 아세톤 냄새가 진동을 한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등마다 불이 환하다. 이젠 길을 잃지 않는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나, 굽은 등을 보았다.

저만치 앞서서 함지박 하나와 삽을 들고 움직이는 굽은 등을 보았다.

머리에 제 빛깔 잃은 수건을 둘렀다.

공사 현장에는 젊은 남자들에 버금갈 만큼의 아줌마들 혹은 할머니들이 때때로 눈에 띈다.

청년과 똑같이 무거운 짐도 거뜬히 날라야한다, 그녀들은.

굽은 등은 오늘 처음 보았다, 그 현장에선.

공사판에서 일하노라 거칠대로 거칠어진 손은 감추면 보이지 않지만

굽은 등은 어디에 감춘단 말인가.

세월의 무게에 굽어진 등을 보고, 나,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할머니 생각이 난다.

쩡쩡하던 할머니, 몇년새에 등이 굽는다.

살림에 보태겠다고 여름이면 남의 밭에 가서 감자를 캐고, 행여 호미에 찍힌 감자를 주인이 가져가라고 하면 부리나케 자루에 담아 무거운 줄 모르고 지고 오시는 할머니 생각이...

봄이 되기가 무섭게 묘목장에 나가 어린 나무들을 심으면서 허리 한번 길게 펼 시간이 없는 할머니 생각이...

한 여름 뙤약볕에 머리수건을 양산삼아 고추를 따는 할머니 생각이...

굳어진 찬 밥을 먹으면서도 식구들 생각에 웃음 지었을 할머니 생각이...

해도해도 펴지지 않는 가난에 이젠 포기란 놈이 들어선 걸까?

어느날 문득 할머니의 등은 굽어져 있었다.

 

아침의 그  아세톤 냄새가 훅 끼쳐온다.

이제 나,  매니큐어는 바를수 없을 것 같다.

아세톤 위엔 더 두터운 먼지가 쌓일테지만...

삶의 무게에 눌린 굽은 등이 더이상 없었으면...

아세톤 냄새는 지친 노동의 냄새였구나, 힘겨운 삶의 냄새였구나...

아세톤이 싫어지는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