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덮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애니깽"이란 단어를 검색해보는 것이었다...
언제 어디서부터 그 말이 내 깊은 곳에 들어와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속의 에네켄 농장을 현실에서 한번 검색해보고 싶었다.
과연 작가의 묘사대로 실존했었을까? 역사소설이라고 하니 무조건 안 믿을 수도 없고, 하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한줄한줄의 글을 읽으면서 저절로 그려지는 참담한 그림을 몰아내려고 자꾸만 도리질 쳤기에, 나 스스로 진실을 밝혀 궁금증을 해결해줘야할 것 같은 의무감으로 인터넷을 검색했다.
애니깽--1905년 4월 제물포항을 떠난 한국인 1033명이 일본 국제이민사기단에 의해 4년간 계약노동자로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 팔려간 이후....
아! 사실이었구나. 설마설마 했는데...막상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밀린 숙제를 해결했을때처럼 후련한게 아니라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설령 등장인물과 설정은 모두 가상이었을망정 일포드호에 오른 한국인의 인원수까지 일치하고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실존인물을 모델로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눈물이 날것처럼 코끝이 시큰해져온다.
너무도 무지해서 불쌍했던 선민들, 너무도 힘이 없어 대한제국은 그런 국민들을 차마 지켜주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었다. 교활한 일본놈들...
대륙식민회사의 노간에 속아 4년간의 노동계약서에 서명을 하면서도 곧 큰 돈 벌어서 고향에 논밭을 사려고했던 선민들은 꿈이 있어 행복했었는데, 일포드호가 멕시코에 닿는 그 순간 이미 꿈은 깨지고 있었다.
무지한 대한인들만 그것을 몰랐을 뿐...
한달여간의 긴 항해, 먹을 것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물이 귀한 선박생활, 비좁은 화물칸에서 신분 구분없이 남녀노소 구분없이 서로 부대껴야하는 생활속에서 이성간에 사랑이 싹트는건 당연했으리라...몸과 마음은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었으니까..사랑은 모든 힘의 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것마저 없었다면 살아갈 이유는 빛을 잃었을지도...
조선 사대부 집안의 딸 이연수와 떠돌이 고아 김이정의 사랑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비쳐졌다. 제발 그 사랑이 결실을 맺길 바랬는데, 서로 다른 농장에서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바둥바둥 일하는 동안 사랑 할 시간조차 없었던 그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혼자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악덕 통역관인 권용준의 품에 안겼던 연수를 이해한다고 하면 그건 거짓이겠지..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싶지만, 살아남기 위한 최선책이었다고 하면 그 앞에선 할말이 없어지고 만다. 비단 연수뿐만 아니었다. 같은 조선인이면서도 오히려 현지인보다 더 악독하게 굴었던 권용준을 따라다니며 굽실거리고 결국 스페인어를 배워 통역관의 길로 들어선 연수의 동생 이진우, 가장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린 남편을 버리고 마야인과 결혼한 연수의 어머니, 악덕 고용주의 눈에 들기위해 거짓으로 종교에 귀의한 후 악덕 감독자가 되어버린 최선길, 연인 연수를 찾을 생각도 않고서 밤에 몰래 보퉁이를 싸들고 농장 담을 넘어 멀리 도망간 김이정, 권용준의 권력을 빌어 농장에서 몸값을 치르고 나왔지만 이내 그를 버리고 탈출해버린 연구 그리고, 다시 박정훈과 살림을 차리고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나온 연수 등등 그들의 행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안다면 무조건 이해해줘야하는 것이다.
첨엔 파하안에 남아있던 여자와 아이들마저 농장에 몸값을 지불하기 위한 100 페소를 모으기 위해 에네켄 밭으로 나서는 장면..에네켄과 에네켄을 보자기로 이어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 아이들을 눕히면 아이들은 개미와 모기에 뜯겨 내내 울어대고, 울다 지쳐 잠들고..그 장면이 너무도 눈에 선하여 나는 눈물이 나고 몸서리가 쳐졌다.
가난한 국민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또한 그렇게 내던져지고 있었다. 가족간의 사랑이 뭔지 행복이 뭔지 느끼지도 못한채 삶을 살아내고 있었가.
부랴부랴 책장을 넘겼다. 그러지 않으면 고통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얼른 끝내야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이들도 자유로운 삶을 얻을 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잠시도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면 이들의 자유에 대한 꿈을 꺾는 것만 같아서 죄스러웠다.
처음엔 별거 아니려니 했던 소설은 내 맘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저려왔다.
1905년에 멕시코로 떠났으니 올해로 100주년...올 광복절에는 멕시코 이민사 100년을 돌아본다고 한다. 이전에는 관심조차도 없었지만 올해는 텔레비젼 앞으로 바짝 다가앉게 될 것 같다. 또다시 가슴은 아프겠지만..
과거를 알지 않고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으니...
당신들의 선택, 고난과 역경 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낸 것에 고개숙여 박수를 보냅니다.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삶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볼려고 노력하는 것이 , 그리고 힘을 키우는 것이 우리의 도리겠지요.
그곳에선 행복하시죠 지금?
억울해하지 마시고, 새로운 개척자의 선봉에 섰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당신들은 위대했습니다.
대한의 애니깽들이여...
2004년 8월 11일 김영하 장편소설 "검은 꽃"을 읽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