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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 나, 눈 뜰 수 있다면


BY 蓮堂 2008-05-15

내일 아침 나, 눈 뜰 수 있다면.

가끔씩 내가 죽는 꿈을 꾸고 난 다음날엔 죽음에 대한 여운이 걷히지 않아 하루 종일 허둥거려야 했다. 꿈밖 현실까지 집요하게 딸려 나온 간밤의 꿈자리는 예견도 예언도 아니건만 혹시라도 기정사실화 될까 지레 겁을 먹은 나머지 떨쳐버리지 못 하는 족쇄였다. 동그랗게 몸을 말아서 온몸에 가시를 두르고 방어 자세를 취해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 목숨을 하늘에 맡기기엔 무언가 억울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음인지 생(生)과 사(死)는 천명(天命)이라고 입버릇처럼 떠벌리던 평소의 내 지론을 여지없이 배반한 꼴이다.

죽음에 대한 느낌은 그저 맹물 들이킨 밍밍한 입맛이었던 것 같았다. 내 죽음을 마치 남의 일 인양 무덤덤하게 지켜보며 죽음은 한낱 삶의 놀음이라고 생각했음이다. 그러나 시퍼런 칼날이 목줄을 건드리는 찰나에 살려고 발버둥 치던 모습을 현실에서 떠 올리면 등골이 서늘하게 젖어온다. 꿈은 삶 밖의 삶이라는 생각을 꿈속에서도 했건만 현실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살아있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평소보다 몇 배나 더 긴 것 같은 밤은 물러나는 것도 더디다.

이렇게 악몽에 시달리는 날은 청회색 빛 여명이 하얗게 벗겨질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 애를 먹는다.

무식하게 살을 꼬집어서 확인하기 보다는 이 세상 안에 나를 드러내어 나를 보여줘야만 안심이 될 것 같은 조급증이 앞섰기 때문에 밀고 당기는 시간과의 의미 없는 싸움을 벌이다 보면 희뿌연 새벽을 맞는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몽롱한 상태에서 시야에 잡히는 익숙한 것 - 잠자기 전까지 본 - 들은 꿈에서의 탈출, 살아 있음에 대한 확인이었다. 죽음의 고리를 벗겨내고 현실로 돌아온 새벽이 믿기지 않아 어둠이 머물고 있는 산등성이를 기어올랐다. 그곳에서 맞는 새벽의 그 시린 입김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느슨하게 풀려있는 눈자위를 팽팽하게 당겨준다.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꿈틀거리는 대지의 진동을 발끝에서부터 느끼게 된다. 발이 저려오고 온 몸이 떨리는, 그래서 고른 숨 쉴 수 있는 그 새벽에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은 나 혼자 뿐 일거라는 우쭐함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오늘을 보지 못하고 떠난 숱한 사람들이 그토록 맞고자 했던 오늘이다. 그들은 이미 살아 있는 나에게는 과거의 사람들일 뿐이다. 나는 누구에게든 미래의 사람이고 싶어서 오늘을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리 속에서 이탈된 존재는 잊히기 마련이고 머물던 자리마저도 이미 내 것은 아니다. 소유도 살아있을 때만 가능한 것임을 알지만 죽어서도 소유할 것 같이 악착을 떨어대는 현실로 돌아온 게 그래도 눈물 나게 고맙기만 하다.

시어른을 모시고 살던 새댁시절 유난히도 초저녁잠이 많아 늘 어른들께 민망한 모습을 보여드려야 했다. 어른들 잠자리도 미처 봐 드리지 못하고 곯아떨어진 나를 보고 ‘초저녁잠 많으면 부자 된다.’는 덕담으로 민망해 하는 며느리를 은근슬쩍 감싸 주시던 시아버님의 말씀이 불면으로 시달리는 날이면 득달같이 달라붙는다.

대 가족 안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내던지듯 몸을 눕히면서 이대로 영영 잠에서 깨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매달리는 심정으로 신(神)에게 간절히 빈 적이 있었다. 잠이 들면서 생을 마무리 짓고 싶었던 부끄러운 기억은 잠에서 깨어나 행복해 하는 요즘의 모습위로 간사하게 오버랩 되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속담을 편들기에 이르렀다.

삶에 연연하며 죽음을 겁내는 이유를 나는 아직 모르지만 나만 죽는 것 같은 억울함과 떠난 자리에 남겨진 흔적에 대한 미련, 우려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나 스스로가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만들어 발목을 내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집착지수도 높아진다는 통계가 헛말은 아님은 나를 염두에 둔 것 같아 슬며시 민망해 지려고 한다.

연세 드신 어른들의 하나같은 소망은 잠자듯이 죽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 듯 그렇게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간절함이 실린 염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잘 잤느냐고 의례적으로 건네는 아침 인사는 밤사이에 생길 수 있는 불상사를 염두에 둔 안부인사이기도 하다.

두 시간 남짓 꿈도 없이 현실을 떠난 적이 있었다. 수술 뒤 마취에서 막 깨어났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현실로 돌아 왔음을 알았다. 간호사가 불러주는 이름 두자가 나를 현실로 끄집어 내 준 것이 너무 고마워서 수술대 위에서 눈물 흘렸던 일은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삶에 너무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웬 지 부끄러워서다. 본능을 무시한 그 부끄러움은 겸손을 가장한 제스처에 불과했지만 훗날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생사의 기로에서 생을 택한 내 운명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잠자기 전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나에게 던지는 당부가 있다.

내일 아침에도 나를 볼 수만 있다면, 내일 아침 나, 눈 뜰 수 있다면 보이는 것 모두 사랑하며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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