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하고 돌아오던 시간이 밤 10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헤드라이트 앞에 두어명의 아이들이 어른 거리는게 눈에 띄었다.
등에는 아직 미처 내려 놓지 못한 가방이 얹혀 있었고,
걸음걸이엔 땅의 높낮이 조차 구분이 안되는듯 휘청 거렸다.
차를 세우고 보니 안면이 있는 동네 초등학교 4학년 아이들이었다.
그 시간까지 학원에 붙들려(?) 있다가 책임 지워진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오는길이었다.
"학원에 다니는게 재미있니?"
근육은 움직이지 않고 아이들은 희미하게 웃는듯 했다.
지쳐있는 아이들의 그 어깨에 드리워진 무게가 너무 무거워 보였다.
무엇을 향한,
무엇을 위한 무게를 그 아이들이 감당을 해야 하는지..
예전에는 9시만 되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조용하고 아늑한 음악 깔아주면서
TV앞에 모였던 아이들을 이불속으로 유도하던 자막 방송이 생각난다.
그러면 아이들은 으례히 잘 시간인줄 알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드는데,
요즘은 그 시간이 훨씬 지나도록 책과 컴에 매달려서 아이들의 순수성이 깡그리 달아나 버린
아픈 이 현실이 빚어낸 후유증을 누가 책임 질것인가..
헤르만 헷세의 'Unterm Rad'(수레바퀴 아래서)가 생각난다.
좀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서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헷세의 자전적 소설로
명예심이 강한 아버지와 교사의 욕심에 떼밀린 주인공 한스에게 오직 州에서 치루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 내기를 강요한 나머지 한스에게서 모든것을 박탈한채 오로지 공부만 시켰다.
그 결과 한스는 대도시의 신학교로 진학을 했지만 심신이 야위어져 갔고
공부에 흥미를 잃은 나머지 학교에서 퇴학 당한 뒤 고향에 돌아와서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술에 취해서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자살인지 사고사 인지 정확하게 밝혀 지지는 않았지만...
100여년전에 씌어진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주입식 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현대의 사고 방식에 일침을 가하고 있는게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소설은 아이들의 창조적인 재능을 짓밟고 의무와 복종만을 강요하는 비 인간적인 교육제도의 모순점에 대한 비판과 격렬한 고발이 담겨져 있어서인지 요즘에도 청소년들에게도 널리 읽히고 있다.
자식들을 위한 교육인지
부모의 못다 채워진 욕심을 위한 대리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 자식만 뒤쳐지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심리 일수도 있겠고
더 꼬집어 말하자면 궁중 심리도 한몫을 하는게 아닌가 의심도 해 본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재능을 키워 주고 싶다면 아이들의 뜻을 존중한뒤에
부모의 욕심을 조금만 더 첨가 시킨다면 화음이 잘 맞을것 같은데 순서가 바뀌었다.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지만 가장 중요한건 아이들의 정서적인게 문제다
요즘 아이들은 '흙'이 뭔지도 모르고 '자연'은 그냥 머릿속에 넣어져 있는 틀에박힌 단어들 뿐이다.
하늘...땅...나무...풀....뭐 이런정도.
순수성을 상실한 아이들에게 또다른 모습으로 들어와 있는건 뭘까
이기심으로 남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맘이 결여 되었고
인내심 부족으로 걸핏하면 폭력과 폭언으로 우리들을 얺잖게 한다.
두발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어 놀아야 할 우리의 아이들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공기가 다 빠져나간 진공상태에서 큰숨 한번 들이쉬지 못하고 갇혀있다.
위인전기를 읽어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즉,
모든위인들이 불우한 환경에서도 노력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그런나 그건 이제 흘러간 전설의 고향으로 밖에 기억될수 밖에 없다.
작년의 통계던가,
서울대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의 가정 환경을 조사해보니
60%이상이 강남에 거주하는 부유층이나 고관대작의 자녀들이다.
노력도 있어야 겠지만 재력과 환경이 갖추어 지지않으면 명문대 진학은 쉽지 않다는걸
단적으로 꼬집어 주는 예다.
미꾸라지 용(龍)되기는 이제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운것도 부인할수 없는 현실이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공부가 인생의 일부지만 전부를 지배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