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가 함께 있어 감사함을 느낀다. 환갑 일주일 전에야 시린 시집살이를 마쳤고, 효부상을 받고도 이런 것 필요없다고 우시기만 했던 엄마다. 평생 노인들 때문에 두 부부가 여행도 못하셨고, 각종 집안 일로 아직도 헤어날 수 없는 엄마, 고모들에게도 할머니보다 친정엄마같은 새언니다. 지금은 외할머니를 모시며 산다. 외할머니, 외증조모 모두 남들이 감탄할 효부상을 받으셨지만, 그 분들도 엄마처럼 책임 때문에 어쩔수 없이 했다고 하셨다. 난 아직 그 분들처럼 강한 책임의식이 없다. 아니 있을까봐 두려운지도 모른다.
어머니란 단어가 가슴이 에일정도로 크게 와 닿게 된 때는 성인이 되어서 5-6년이 지나서 였다. 한때 무척 힘든 적이 있었다.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을때, 잠자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떠보니 엄마가 침대 머리맡에서 나를 보며 울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두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소리없이 가슴으로 우는 울음을 처음으로 울었다. 엄마처럼 나도 함께 우는 것이다. 그후 모든 일에서 절대 가족들에게 가슴으로 우는 울음을 없게 하리라 다짐했다.
결혼후 엄마는 딸네 집에 제대로 편히 오신 적도 없다. 병든 시어머니 때문에 보고픈 딸을 잠시 보려고 이것저것 잔뜩 가지고 오셔서 챙겨넣고, 주방에서 딸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바쁘게 하시고 쉴 틈도 없이 가신다. 가신 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다. 같은 서울서 흔히 살수 있는 것들도 챙겨 놓으시고, 하다 못해 각종 생선도 깨끗이 손질해서 차곡차곡 예쁜 그릇에 담아 오시고 , 각종 김치를 담아 냉장고에 넣고 가신 것이다. 전화로 내가 할 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서툴때는 무엇이든 부족하다고, 시장한번 가려면 차타고 가야 되는데 매번 어떻게 갈거냐고, 김치는 니가 담아 먹어도 되지만 아직은 당신이 손수 해 주고 싶다고 하신다. 출산후 집에 누워있을 때도 하루 종일 장판을 비누 거품내서 수세미로 깨끗이 닦고 또 쉬지 않고 가버리셨다. 난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모든 어머니가 다 우리 엄마 같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할머니가 되신 분 들 중에선..
지금도 엄마의 신신당부의 말이 떠오른다. “시장엔 누구랑 가든지 베불리 먹이고 장보라고,
친정에 와선 절대 내 옆에 있지 말고 엄마를 위한다면 부엌에 가라고, 엄마가 편히 살기를 바라면 당신보단 올케들에게 잘하라고 그리고 시집가선 시댁식구 속에서 네 자리를 잡으라고, 시댁식구들에게 잘하고 어울려야 니 자리가 잡히는 거라고 하신다. 더욱이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당신은 평생 시집살이를 해서 내 딸들은 안하는 곳으로 보랠거라고 하시던 분이
둘째인 남편이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 한다고 하니까 나보고 모시라 하신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첫째, 둘째 나눈 것이 없이 골고루 사랑으로 길렀는데, 니들은 뭐길래 따지며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고 선을 긋냐고, 올케보니 민망하니 절대로 다시는 입밖으로 내지 마라하신다. 내가 가끔 투덜거리며 시댁이야기를 하려하면 너 보면 내 며느리 생각이 나서 조심하게 된다고 당신이 힘드니 전화하지 말라고 하신다. 난 그러면 “ 친엄마 맞아?” 하고 소리치며 끊는다. 그리곤 그런 엄마가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한다. 내게 누가 나를 잘 알아서 이렇게 도움이 되는 쓴말을 가슴 아프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이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하는 사람들 건강에 신경이 쓰인다. 아직도 난 부모님이 안 계시는 상황을 상상도 하기 싫다. 그러기에 아버님을 몇 년 전 잃은 남편이 가엾고, 또 그래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싶은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