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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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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놀이터


BY 수련 2007-09-19

 

삶의 놀이터




 때늦은 백합이 한 무더기 피었다. 작년 가을쯤 밭 가장자리에 야생백합 구근을 몇 개 얻어 심었는데 주인 닮아 게으름을 피우는지 개화시기가(6월~7월) 지난 8월의 끝자락에 몇 며칠 용트림을 하면서 길쭉한 봉오리를 만들더니 드디어 한줄기에 6~7개의 하얀 꽃을 차례로 내밀기 시작했다. 도합 스무 송이 넘게  백합이 핀 것이다.

백합이 저렇게 아름다웠던가. 우유 빛 꽃잎사이의 노란 꽃술이 코끝에 묻어나도록 코를 박아 냄새를 흠흠 거렸다. 아, 이게 무슨 냄새인가. 전설처럼 아득한 엄마의 젖 향기가 온몸의 세포를 간들거렸다.

주피터 신이 아기 헤라클레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어서 그의 아내 주노를 잠재우고는 헤라클레스에게 주노의 젖을 빨게 했는데 젖을 빨던 헤라클레스가 보채자 주노의 젖이 몇 방울 땅에 떨어지면서 그 자리에 향기로운 백합꽃이 피었단다. 순결, 영원한 생명의 뜻을 지닌 백합이 우리 밭에 피었다는 것만도 저절로 청순하고 순결해지는 것 같다.


 3년 전, 남편의 고향인 진해에 정착하면서 텃밭도 마련하였다. 말이 텃밭이지 600평이면 결코 작은 평수가 아니다. 농사에는 무지한 우리 부부는 궁리를 했다. 넓은 땅에 농작물을 다 심을 수는 없어 절반 정도의 땅에는 나무를 심고, 나머지 땅에는 여러 가지 농작물을 조금씩 심어 무공해 반찬거리를 만들자고 합의를 보면서 나무를 심는 밭의 절반은 남편이 관리하고, 밭의 입구 쪽은 내 영역으로 반을 나누었다.

내심, 나는 내 영역의 절반을 꽃밭으로  만들기로 작심하였다. 채소를 많이 심어봤자 남편과 내가 다 먹어내지 못하니 괜한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 아파트베란다에서 마음껏 키우지 못했던 야생화를 심어 계절 따라 저 너머의 그리움을 피우게 하리라.


 첫 해, 봄이 되어 농사꾼 흉내를 내며 고추모종을 사고, 상추, 쑥갓, 열무, 아욱 씨앗들을 사서 양쪽 가장가리로 심고, 가운데는 길쭉하게 잔디를 심었다. 잔디 양쪽으로 벽돌을 길게 놓아 징검다리처럼 디딤돌을 만들고 벽돌 따라 덩이괭이밥을 쭉 심었더니 앙증맞은 작은 자홍색 꽃을 피워 발걸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연장을 넣는 창고 앞에 대나무로 엮어진 정자도 세워 일하다 힘들 때 쉬는 자리로 해 놓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그 주위에 여러 가지 야생화를 심었더니 해가 지나가면서 꽃들도 제법 제자리를 잘 잡아 해마다 봉오리를 만들며 여러 색깔로 채색하며 아름다운 유희를 만들어냈다. 봄이 되면서 솎아먹다 남은 겨울초는  많은 꽃대를 뽑아 노란 유채꽃으로 남실거려 갖가지 씨앗을 뿌리려고 준비하는 일손에 흥을 돋우고. 한 그루 목련나무는 겨우내 매달고 있던 꽃봉오리를 부풀려 연방 터트릴 준비를 한다. 화초의 마음이 넉넉한 친구 집에서 야생화를 종류별로 얻어다 심고,  꽃을 좋아하는 선배도 아파트베란다에서 키우기 부적합한 화분들을 우리 밭에다 옮겨 심어주기도 하여, 그 해  숨 가쁜 봄은 꽃망울에 입김을 불어넣더니 하나 둘씩 생명의 기쁨을 형형색색의 꽃으로 피움으로써 마음껏 자랑하며 조화를 이루었다. 꽃마다 자신이 지닌 빛깔과 향기를 한껏 발산하면서.

상추 새싹이 나기시작하면 수선화가 인사를 하고, 노루발을 닮았다하여 이름 붙여진 노루발도 뒤질세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연보라색 꽃을 피우고, 한쪽으로 모아 심어 놓은 창포들도 질투하듯이  흰색, 노란색, 보라색 꽃망울을 터트린다. 연이어 조개나물도 납작납작한 조개 모양의 이파리 사이로 자색 꽃을 몽글몽글 피워내고, 선배네 아파트 베란다에서 옮겨 심어놓은 할미꽃은 한 달 가까이 튼실한 꽃을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오랫동안 매달고 있는걸 보니 땅 냄새를 마음껏 마시며 자연으로 돌아와 기운이 펄펄 나는가 보다. 매발톱, 패랭이, 톱풀, 파라솔, 노루귀, 앵초,... 제비꽃, 민들레도 한몫 거든다.


 봄이 지나가자 밭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호박에도 노란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호박을 보면 유년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엄마가 호박나물과 호박전을 잘 만드셨는데 내가 젓가락을 갖다 대기만 하면 오빠들이 놀렸다. 호박을 많이 먹으면 못생긴 ‘ 호 박순’이가 된다는  말이 사실인줄 알고 오빠들이 맛나게 먹는 모습을 침만 삼키고  지켜보았었다. 그 후로 순진한(?) 나는 호박반찬을 잘 먹지 않았다. 지금은 밭에 심은 호박을 따다 호박나물, 호박죽, 호박전, 애호박 갈치조림 등,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어  잘도 먹는다.

 꽃밭이 심심해 보여 주둥이가 넓은 큰 고무 통을 화단 한 가운데 묻어놓고, 흙을 깔고 물을 담아 수련을 심었더니 뿌리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얼씨구나 좋아하며 자기들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올챙이가 보이나 싶더니 어느새 개구리로 성장 하여 천방지축 개굴거리며 폴짝 폴짝 뛰어다녀 사람을 깜짝 깜짝 놀라게 하였다. 잎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봉곳이 봉우리를 물 밖으로 내밀기 시작하여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에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흰색, 노란색 수련은 더위를 잊게 만들 정도로 입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어디서 저런 아름다운 꽃이 흙탕물속에 있었을까. 한 사흘정도만 뽐내고는  감쪽같이 물속으로 잠수해 버린다. 밤이 되면 문을 닫아걸듯이 꽃을 오므려 마치 수면을 취하는 것 같아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나. 


 올여름에는 유난히 더워 해가 떴다하면 이글거리는 햇살에 잠시도 밭에 머물지 못해 이른 새벽에 일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밭으로 향한다. 해가 뜨기 전에 서둘러 호미를 들고 채소밭에 엎드려 열심히 풀을 매다가 문득 내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피식 웃음이 나온다.

헤르만 헤세도 자기 집 정원을 가꾸면서 ‘땅에 무릎을 꿇고 잡초를 뽑아내는 일은 마치 하나의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마치 내 모양새가 땅과 무슨 비밀스런 음모를 꾸미는 것 같아 보인다. 쭈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날 때쯤에 일어나서 휴대용 가스렌지에 물을 끓여 컵에 페파민트 잎을 몇 개 띄워 박하향이 나는 상큼한 허브 차 한 잔을 들고 대나무 정자에 앉아 아침이 맑게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유유자적 한 시간가량 책을 읽는 즐거움은 고즈넉한 소쇄원의 정자에 앉아 글을 읽는 선비가 되어 독서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주말이면 남편과 반나절을 밭에서 보낸다. 늦게 심은 오이 모종이 쑥쑥 자라 네 개의 장대에 엇갈리게 줄을 엮어놓았더니 신나게 노란 꽃을 피우며 타고 올라가 팔뚝만한 오이를 매달면 일하다 지친 우리부부의 갈증을 달래주었다. 한 개를 따서 반으로 툭 잘라 남편 한입 내 한입, 상큼한 오이 즙이 입안에 가득 고인다. 아,  그 싱싱함이란.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밭에서 수확한 가지를 찌고, 고구마줄기를 데쳐 젓국에 버무린 나물과 애호박을 넣은 갈치조림을 만들고,   상추, 쑥갓위에 더운밥 얹어 입이 미어져라 우물거리며, 고추를 된장에 푹푹 찍어먹는 그 맛은, 한정식집의 상다리 부러지는 진수성찬이 탐나지 않는다. 내 손으로 키운 무공해 채소들은 여름 내내 우리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남편도 나도 초보농사꾼이라 유실수가 여남은 그루 있어도 아직 수확을 해보지 못했다. 꽃이 피기 전에 약도 치고 거름도 듬뿍 줘야하는데, 열매가 달렸다가 제대로 커지기도 전에 다 떨어져 버렸다. 배꽃이 하얗게 피고, 분홍색 사과 꽃, 통통한 아가 볼처럼 도톰한 감꽃도 눈만 즐겁게 해주고 그 결실을 맺지 못하니 어찌 나무 탓만 하리. 무식하고 게으른 주인을 만나 열매가 달리지 않으니 오히려 나무보기가 민망하다. 내년에는 인터넷을 뒤져 친환경용법으로 약과 거름을 만드는 법을 배워 유실수의 몫을 다할 수 있도록 부지런을 떨어 보련다.  올해 여름처럼 진저리나는 더위에도 일하다 지친 주인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 꽃들이 그저 고맙다.

처서가 지나면서 끈질긴 여름도 뒷걸음치며 저만치 물러간다. 선선한 바람에 생기를 찾은 가을꽃들이 슬슬 얼굴 내밀 차비를 하겠지. 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은 국화 한 더미에 벌써 꽃망울이 맺히고, 야생 쑥부쟁이, 코스모스도 하늘거리며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해줄 것이다.

 가끔씩 위쪽 밭의 할아버지 보기가 민망하다. 조금이라도 빈 땅이 있으면 농작물을 한 가지라도 더 심어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하는데 우리 밭은 작물보다 꽃밭이 자리를 더 차지하고, 유실수보다 조경수가 더 많은데다  잔디까지 심어 놓았으니 혀를 찰 노릇이지만 할아버지는 내려다보시고 꽃이 피어있어 좋다면서 엉터리 농사꾼인 우리를 보며 잘 익은 무화과 두 개를  마음이 넉넉한 웃음으로 건네주신다.

여든이 다 되셨지만 젊은 우리보다 더 건강해 보인다.

“할아버지 연세도 많으신데 이제 좀 쉬시죠.”

“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해서 어쩌라고, 여기가 내 <놀이터>인데.....”


 아, 맞는 말인 것 같다.  많은 세월을 도시의 사막에 살아오면서 각박해지고 황폐해진 몸과 마음을 흙냄새를 맡으며 자연과 교감하면서 채소를 가꾸고, 꽃과 개구리, 찾아드는 새들과 나비, 잠자리와 벗을 삼아, 야생화와 어울려 산다면, 우리의 삶은 풀냄새 나는 향기를 내뿜으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텃밭은 내 글의 많은 모티브가 될 것이며 남편과 나의 여정을 여유 있고 풍요롭게 해주리라. 남편이 퇴직하면 무료하지 않게 텃밭과 더불어 인생의 동반자로 ‘소박한 삶의 놀이터’로 가꾸어 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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