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어둠의 산조>-이승하, 박태일, 이영진의 근작 시 세계
시인의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성격에 따라 꽃은 서로 다른 빛깔로 채색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속에서 노래되는 제각기 다른 꽃의 빛깔은 서로 다른 시인들의 섬세한 삶과 운명의 빛깔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승하, 박태일, 이영진 시인은 90년대의 한가운데 자리에서 제각기 서로 다른 꽃의 세계를 시화하고 있다. 이승하의 시 세계에서 꽃은 찰나적인 생명에 대한 허무와 공포의 빛으로 채색되어있다. 박태일의 시 세계에서 꽃은 존재와 비 존재가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의 시에서 꽃은 시적 화자를 비 존재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의 길로 인도하는 빗장 열린 문이다. 이영진의 꽃은 열혈의 80년대를 관통하면서 생긴 상처 난 몸에서 피어나고 있다. 그의 꽃은 지난 80년대의 울분, 절망, 고통의 두터운 퇴적층에서 피어났기에. 그만큼의 깊고 넉넉한 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생명적 시간이란 현존하는 몸으로부터 생성, 확산한다고 여긴다.
<어둠의 주술, 신성한 적의>-김정란의 시세계
김정란의 시집 『스, 타, 카, 토 내 영혼』은 독자의 호흡을 압도하는 한 젊은 영혼의 철저한 소외, 자학, 방황, 적의, 반란의 드라마이다. 이 영혼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억압적인 외부 세계를 향해 처절하고 지난한 싸움을 펼친다. 그의 싸움의 대상은 권력적인 지배질서와 불온한 역사 현실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집도처에서 매우 생경하고 이색적인 악마주의 적 탐닉과 섬뜩한 주술의 열기가 날것으로 뒹굴고 있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다음 시에서 시적 자아가 유령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와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1974년 11월 20일"
새벽에 네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네가 나를 부르며 흐릿한 내 모습을 조금씩 다듬어갔다.
네 눈앞에서 알몸으로 서서, 나는 분명해지는 내 육체의 선,
그 적막한 전율의 기쁨을 만나고있었다.
환희의 날개를 퍼덕이며 네 앞에서 드러나는 나의 헌신 -「제 6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제의 적 희생을 동반하는 신성의 에로티시즘이 극치를 이루는 부분이다. 물론, 이 시편에서 새벽녘에 실체도 없이 환청 같은 울림으로 다가온 당사자는 유령이다. 그는 생의 불안과 두려움에 소극적으로 참작하지 않고 어떤 현실적 구속과 파탄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강한 영혼을 적극적으로 단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후기 산업사회의 교묘하고 정교한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이 가시화 될 때마다 그의 전사적 면모가 더욱 크게 전면에 부각되는 연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적멸의 안과 밖> -이상호, 최승호의 시세계
인간의 무한성은 유한성의 현존을 해체하여 영원성의 심미적 준칙과 관련시켜 도달해나가는 사유의 가능태이다. [뉴욕 드라큘라] 와 최승호의 [눈사람]의 시적 주제의식은 제각각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이냐 하는 실존적 선택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있다. 이상호의 시에 등장하는 중심인물들은 안락사를 생각하는 불치병자 혹은 하반신 마비, 사지마비, 반신불수 등의 고통에 신음하는 절박한 병실의 환자들이다. 최승호 역시 이번 시집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실존적인 관점에서 깊이 있게 직시하는 면모를 보인다. 시인의 시 세계에서 죽음의 문제는 그의 첫 시집 이후 지금까지 일관된 주제의 하나이다. 그의 시 세계에서 죽음 의식은 생멸의 경계로부터 자유로운 적멸의 안으로 뿌리를 뻗고있는 것이다.
시인의 그의 시 세계에 등장하는 환자들의 질병원인에 대해 빈번하게 우리의 불온한 역사적 상황과 인간 경시의 풍조가 만연한 현실세태를 지적하고 있다. 이상호에게 외부세계는 인간생명을 붕괴시키는 횡포적인 대상으로 파악된다. 직접적으로는 인간의 질병의 문제로부터 간접적으로는 불온한 사회, 역사적 상황과 오늘날의 세기말적인 문명세태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삶의 세계를 와해시키는 죽임의 세력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지상 위의 모든 것이 유한적 숙명을 지니고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삶과의 절멸이며, 완전한 단절이라는 절망의 심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최승호는 이번 시집[눈사람]에서 "축복해주십시오, 구더기에서 벗어났습니다. " 실제로 그의 이번 시집은 잔잔한 호수 위를 나는 나방의 날개와 같은 유연함, 부드러움, 허허로움, 가벼움이 느껴진다. 종전의 그의 시 세계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자본주의 세계의 온갖 모순과 허위에 대한 비판과 적의를 석조 부조 품처럼 견고하고 메마른 기법으로 묘파 해내는 날카롭고 섬뜩한 면모이다.
그리움을 사는 언어-안도현 론
그의 시적 그리움의 언어는 과거형은 물론이고 미래형의 대상을 향하기도 한다. 소멸해 가는 기억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다림으로 변주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의 정겨운 그리움의 노래는 불온한 현실 상황과 대면할 때 고통과 부정의 언어로 전환되기도 한다. 그의 현실저항의 시편들은 여기에 해당한다. 그의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형상화가 많은 경우에 감성적인 정감의 차원을 넘어서서, 그 이면의 본질적인 삶의 지층에까지 견인해내는 단계로 확장되어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기다림의 역설적인 긴장과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방법 찾기는 “바닷가 우체국”을 발견한 시기는 이때이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 -「바닷가 우체국」
위시의 우체국은 그리움과 기다림의 애틋한 긴장이 지속적으로 살고있는 집이다. 안도현의 시 세계의 창작원리가 그리움의 시학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성의 위기와 재생-고진하론
그의 시 세계가 철저한 부재와 결핍의 고통에서 초월적인 신성의 풍요로 전이되는 양상은 인과론적인 연관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시적 도정은 신화적인 성과 속의 교호성의 리듬에 조응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을 향한 향수는 신이 현존했던 태초의 완전성, 그 강력하고 신선하며 순수한 생명 세계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신화적 상상력은 인간세계의 종말론적인 탈신 성화의 시대와 이에 대한 성현을 통한 재생이라는 종교적 구원론을 토대로 한다. 다음 시를 살펴보면 고진하의 시 세계는 점차 도시의 일상으로 이동한다.
광고탑, 뜨겁게 달아오른 아라비아 숫자들이
불 인두처럼 이글이글 내 몸에 닿아
쉬 지워지지 않을 깊은 문신을 아로새긴다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
자본주의의 소비 희로망이 인간의 육체에 "쉬 지워지지 않을"아라비아 숫자의 문신을 표시하고 있다. 위시에서 광고탑의 아라비아 숫자에 의한 문신은 인간을 소비 이데올로기의 충직한 식민으로 재구성시키고자 시도하는 후기 산업사회의 운용원리에 대한 상징적 표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늘 깊은 노래-박해석의 시 세계
박해석의 첫 시집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40대 중반에 이르는 고단한 삶의 시련과 상처로 엮어진 간곡한 세월의 나이테이다. 그의 시 세계의 신경 조직망은 거대한 외부 세계와 맞서온 자신의 지난한 삶의 견인력과 고통의 마디 절로 이루어져있다. 다음 시편은
그의 삶과 시의 관계성을 응축적으로 드러내준다.
나는 육이오 전쟁 중에 태어나 오늘까지 살아 남았다
아우슈비츠 유대인만큼 지독하지는 않지만
헐떡이며 숨막히며 가슴 두근거리며 살아왔다.
머리털 손톱 발톱 뽑히지 않았지만
내일을 모르고 희망의 벽에 둘러싸여
세상 밖으로 나가려고
이 세상 밖이라면 어디로든 나가보려고
오늘을 할퀴며 살아왔다.
....................................................... -「나쁜 서정시」
시인은 전쟁 중에 태어나 죽지 않고 면면히 이어온 자신의 고단하고 끈덕진 목숨에 대한 회한과 정서가 묻어 나온다. 박해석의 시 세계는 그의 그늘 깊은 노래의 저력이 마침내 세상에 억눌린 채 살아가는 한 많은 가슴들을 정화시키는 신명의 미학으로 고양될 것이다.
길 없는 길의 시학-박세현의 시 세계
박세현은 길의 시인이다. 그는 끊임없이 길을 떠나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의 길을 만나지는 못한다 없는 길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여로, 이 역설이 박세현의 삶의 숙명이며 시 세계의 진경이다. 1990년대는 이른바 가야할 길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로 자주 언급된다. 맹목에 가깝게 이념의 불꽃을 향해 질주하던 80년대와 뚜렷하게 변별되는 이러한 시대 인식의 저변에는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 현실이 후기 산업사회의 거대한 회로망에 완전히 나포되었음을 승인하는 허무와 좌절의 의식이 내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터벅이며 걸어온 길이 새삼스러워진다.
불쌍한 것! 갈 길은 얼매던가
지나온 길이 또 갈 길이 아니더냐 -세상 밖으로
세상 밖으로 "걸어온 길"이 다시 걸어가야 할 길로 놓여있다. "불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길을 걷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일상성의 회로망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떠나는 길은 있지만 도달해야 할 길은 사라진 형국, 이 역설이 박세현 시인의 길 찾기의 여로이며 삶의 숙명이다.
삶의 욕망과 죽음의 충동 -박주택론
박주택은 죽음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에로스적 욕망의 언어를 섬광처럼 뿜어내고 있다. 그는 80년대 중반 데뷔하면서부터 우리시단의 관습화된 상상력의 범주를 과감하게 탈주하는 면모를 과시하였다. 현실이 무겁고 억압적일수록 그의 우주적 상상력은 생기와 환희의 언어로 활기차게 비상한다. 그의 첫 번째 시집『꿈의 이동건축』은 현실적인 존재와 우주적인 생명과의 일원론적인 연속성을 추구하는 신성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준다. 그의 두 번째 시집『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에 오면 "지친 넋을"이끌고 "여행자처럼 돌아오는"자신의 뒷모습의 소묘를 보여준다. 신성적 에로티시즘이 점차 나르시시즘의 충일성으로 수렴되고있는 것이다.
여행자처럼 돌아온다.
저 여린 가슴
세상의 고단함과 외로움의 휘황한
고적을 깨달은 뒤
시간의 기둥 뒤를 돌아 조용히 돌아온다.
어떤 결심으로 꼼지락거리는 그를 바라다본다
숫기 적은 청년처럼 후박나무 아래에서
돌멩이를 차다가
비가 내리는 공원에서
물방울이 간질이는 흙을
바라다보고 있다.
...............................................................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기억의 끝"을 잡고 돌아오는 그의 걸음걸이는 조용하고 느릿하다 그는 이 조용하고 느릿한 걸음을 통해 "물방울이 간질이는 흙"이거나 비에 젖는 "의자"등의 작고도 사소한 일상적 공간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탐닉한다. 우주적 지평으로 확산하던 시인의 시선이 내밀한 일상세계로 응축되는 구심력 적인 수렴의 면모를 선명하게 드러내고있는 것이다.
닫힌 공간과 폐허 의식 -이윤학론
이윤학의 시 세계는 시간성이 휘발된 닫힌 공간의 언어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공간은 변화와 개방성의 출구가 막혀있다. 그의 사진과 세계의 실체에 대한 시적 인식은 한결같이 어두운 기억의 범주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을 부정함으로써, 현존재자의 비관 의식을 관조적으로 통어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에게 미래에 대한 부정과 단절은 '지금, 여기'의 삶의 현상을 섬세하고 집요하게 묘파 해내는 추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창문은 서쪽으로 나있다. 떠나려는 노을이
붉어지는 집, 창문에
거꾸로 씌어진 글씨를 읽는다
먼지의 집, 창문 안엔 멎은 지 오랜
벽시계가 걸려있다. 엎어놓고 간
귀떨어진 대접들이 있다. 빈 병에도
채워지는 먼지가 있다. ................
..........................................................-「판교리 8--먼지의 집」
시적 화자는 "벽시계" "대접" "빈 병"등이 헝클어진 어둡고 음침한 폐가를 찾아온다. 화자가 과거에 살았던 곳으로 여겨지는 이곳은 빈 병에 채워진 자욱한 먼지만이 세월의 흐름을 알려 줄뿐, 아직 모든 기억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정적의 공간이다. “먼지의 집”은 시적 화자에게 지난 삶의 현상들을 있었던 그대로 재현해 보이고 있다. 닫힌 공간의 정태적인 집을 부수고, 열린 공간의 새로운 신생의 집을 짓기를 기대한다.
비극적인 세계 인식과 내성의 견인력 -이대흠론
이대흠의 시 세계는 대체적으로 어둡다. 그는 과거의 삶이 비극적이었듯이 미래의 삶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꿈이란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유예되는 것, 영원한 부재가 그 숙명임을 이미 냉정하게 인식한 채, 삶의 길을 떠난다. 그래서 그의 시 세계는 어두운 것만큼 통절한 슬픔과 비탄의 울림이 넘쳐나지는 않는다. 이대흠의 시의 기조를 이루는 비극적인 세계인식은 늘 그에 대응하는 내성의 힘을 신장시켰었다는 점은 앞에서도 강조한 사항이다. 외부세계의 횡포에 대한 내적 견인력의 부력이 우위에 설 때, 그의 시 세계의 기본 음조를 이루는 어둠의 빛깔은 점차 희석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이대흠은 첫 시집에서 상당히 여러 층위의 세계를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생의 뒷장을 넘기지" 못하여 "구슬처럼 작"(지나온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은 내부 세계에 갇혀있던 그가 외부 세계까지 포괄하는 가없는 수행의 모습을 띠는 것은 분명 짧은 시력에 비해볼 때 비약적인 모습이다.
여백의 사유 -장철문론
장철문은 겨울 시인이다. 무성했던 나뭇잎을 모두 떨군 채 텅 빈 허공 속을 침묵으로 지키는 고졸한 겨울 나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에게 시적 언어의 형체는 여백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그의 시의 창작 주체는 바로 여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 과정은 그가 펼쳐놓은 섬세한 여백의 사유와 선율의 연주를 듣고 교감하는 일이 된다. 장철문이 노래하는 견고한 내성의 추구는 겨울의 본성과 직접관련 된다. 우주변화의 내재적 원리를 설명하는 음양오행론에서 내부적 수렴과 응축의 정점에 해당하는 겨울은 음에 배속되는 수기의 국면에 해당한다. 겨울나무 속의 극점으로 응집된 수기에는 다시 상승하는 봄의 목기가 준비되고있는 것이다. 겨울나무는 정태적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자기 조직화 운동을 수행하는 동태적 대상이다. 따라서 겨울 숲의 공허는 절대 무가 아니라 있음의 없음, 끊임없이 활동하는 생명의 에너지의 자장력으로 미만해 있는 것이다.
생략이란 저런 것이다.
꼭지가 듣도록, 한 생애를
채웠다 비우고
모세혈관처럼
허공을 껴안은 가지들
그 시린 가지 끝의 서릿발
磁場에
가뿐히 몸을 부린
까치 한 마리
..............................................-「겨울가지」전문
겨울날의 고졸한 풍경의 여백에서는 무수한 생명의 기운이 상호 교통하면서 내밀한 상생과 상극의 질서를 형성시키고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사물은 대상화된 객체가 아니라 신묘한 자연의 질서를 관장하는 주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