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돈 추문속 가슴 아픈 우리의 연말풍경 노숙자 연 400명 서울서 죽어간다'
이 글은 2001년 12월 22일자 한국일보 1면 톱기사의 제목으로, 임시회의로 교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눈에 띈 신문 기사 내용이다.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일면서 4개월 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마주치던 얼굴들이 되살아났다. 눈에 생기라고는 전혀 없고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세상 다 산 듯한 절망감이 느껴지던 노숙자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들이다.
9월부터 12월까지 중국어 초급과정을 수강하기 위하여 시민대학을 다녔다.수강일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로 을지로 3가와 을지로 입구를 연결하는 지하보도를 지나게 된다. 그 길은 족히 7∼8분 정도 걸리는 매우 길다고 느껴지는 길이다. 긴 기둥을 가운데 두고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의 모습은 잘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긴장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거기에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사실과 가끔 불쑥불쑥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타나는 노숙자들 때문에 깜짝 놀라기도 하는 곳이다.
9월 어느 목요일 밤이다. 을지로 입구를 지나 을지로 3가 지하보도로 들어서는데 찬송가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몇 년째 교회를 나가지 않는 나에게 찬송가 소리는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다가오고 그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중간쯤 왔을 때였다. 기둥 오른편에 마주 보고 쭈그려 앉은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가운데 임시 마련된 전자 올갠에 맞춰 복음송을 부르는 한 여자 성도님을 따라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듣고 있는 사람, 열심히 따라 부르는 사람,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채 잠자고 있는 사람 등 얼굴 표정만큼이나 모양새도 다양하다. 공통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무덤덤한 표정이나 절망감이 느껴지는 생기 없는 눈빛이다.
왼편에는 띠를 두른 교인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서서 찬송을 부르고 있다. 선교 단체에서 그들의 자활의지를 돕기 위해 매주 목요일마다 임시 예배당을 만들어 예배를 보는 것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베푸는 자와 베품을 받는 자' 그들은 다 누구인가? 그들을 바라보며 지나 쳐오는 나는 누구인가? 신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갑자기 찬송소리까지 귀에 거슬리기 시작하면서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지나왔다. 그때 갸름한 얼굴에 말쑥한 옷차림을 한 사십대 중반 아니면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애써 외면하는 그 여자를 향해 나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원망도 미움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이 왜 그리 처연해 보이든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울적했다.
노숙자 대부분이 남자인데 그 중에 여자는 너 댓 명 섞여있었다. 그 여자들 중에서 유난히 체격이 왜소하고 갸날퍼 보이던 그녀에 대해 알 수 없는 궁금증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부모 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젊은 시절 꿈도 있었을 테고 한 때는 열정적인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지.'
'남편과 자식은 있는 걸까? 아니면 헤어진 걸까?'
'파출부라도 해서 살지.'
'저렇게 되고 싶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인간의 삶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했다. 그런데 집이 가까워지자 "휴" 하는 안도의 숨이 나오며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왜 그리 소중하게 느껴지든지…… 한편으로는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에 착잡하기도 했다.
매주 목요일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복잡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히며 기도하는 마음이 되곤 한다.
'저 사람들이 하루빨리 이곳에서 벗어나 가족과 다시 만나고 삶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빠져나오듯 외면하고 지나오다가도 항상 그녀가 있나 없나를 곁눈으로 확인하는 마음은 무슨 심정일까? 나약한 여자이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내 마음속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보는 것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어쩌다 한 번 보이지 않은 날은 그 다음 목요일까지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으면 참 다행이다 싶은 안도감을 가져보기도 했다.
그녀를 마지막 본 것이 을지로 3가 지하계단이다. 체격이 큰 여자와 함께 계단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며 '얼마나 추울까?' 라는 생각만 했을 뿐 이야기라도 한 번 나누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의 불행에 동정은 하면서도 선뜻 도움을 줄 생각을 못하는 나약한 이기심이 부끄러웠다.
나의 티끌 만한 불행은 한없이 큰 것 인양 여기고, 남의 큰 불행은 작은 티끌만큼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무관심도 죄가 아닐까? 그들의 아픔이 오늘만이라도 우리 모두의 아픔이 되어 위로가 된다면 좋으련만……
노숙자라는 어휘가 사라지고 그녀에게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온 어리석음이 오늘따라 왜 이리 부끄럽고 초라해 보이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