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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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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BY 다정 2003-09-12

낙엽
                                                                
   
  나는 낙엽을 좋아한다. 고즈넉한 산사나 오솔길에 쌓인 낙엽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길을 걷는 것도 좋아한다. 그리고 낙엽을 태우며 그 냄새에 흠뻑 취하는 것은 더 좋아한다.
  이년 전 두 팔을 엇갈려 감싸안을 정도로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이다. .2교시가 막 끝나갈 무렵 운동장 쪽 창문 틈을 타고 교실로 번져오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냄새를 따라 창가 쪽으로 다가가니 운동장에서 학교 아저씨 두 분이 낙엽을 태우고 계셨다.
 '아! 낙엽 타는 냄새였구나'
 가벼운 탄성과 함께 코끝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스포이트를 통해 번져나가는 청색물감의 여운처럼 교실 전체로 스며든 낙엽 타는 냄새에 취해 하루를 행복하게 보냈다. 내 마음을 따라온 구수한 고향의 냄새였던 낙엽 타는 냄새는 그 다음 날도 창가로 스며들며 나를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을 자습시켜 놓고 나갈 수도 없고, 설사 자습시켜 나간다고 해도 교장선생님이나 교감선생님께 들키기라도 한다면……'  
  '궁하면 통한다고 하던가!'
  아이들 책상 위에 놓여진 연을 바라보다 연날리기를 핑계삼아 운동장에 나갔다. 연날리기를 시켜놓고 낙엽 태우는 곳에 가서 낙엽 타는 냄새를 맡으려고 했는데 1학년 꼬마들이 내 마음을 알고 내 뜻대로 하게 내버려둘 것 같지가 않다.
  "운동장을 마음껏 뛰며 신나게 연을 날려보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실이 서로 엉켜 연줄이 끊어졌다는 아이, 연이 잘 날리지 않는다는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말로는 연을 어떻게 만들고 날릴 때는 바람을 잘 이용해야 한다며 말했지만 어린 시절 연을 날려보고는 여지껏 날려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모르면서도 아는 척 하며 대충 실을 묶어주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높이 들고 다시 해보라며 등을 뛰다 밀기도 하였다. 점입가경이라고
  "'안되요"
  "못하겠어요"
  하며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쩔쩔매고 있는데 목소리 크기로 유명한 기사 아저씨가 혀를 끌끌 차며 아이들을 오라고 손짓하시는 게 아닌가!
창피함과 무안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저 아저씨가 잘하시니까 가서 해달라고 해"
  연날리기에 미련이 남은 아이들은 아저씨께 보내고 나머지 아이들을 몰고 노란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화단으로 갔다.

 

 


  "지금부터 선생님하고 은행잎 싸움할거예요. 신나게 던져보세요"
  처음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던 아이들이 내가 던지는 은행잎에 얼굴을 맞고는 나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 큰소리를 지르며 서로 쫒고 쫒기며 한바탕 전쟁터와 같은 난장판 축제를 펼쳤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제일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겨진 이 일이 내게는 며칠동안 머리를 감아도 흙먼지가 계속 나온 낙엽이 가져다준 하나의 추억이다.
 계속 하기를 원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낙엽을 태우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이미 낙엽을 태우며 사색에 잠겨있는 분이 한 분 계셨다.
 '늦가을 날의 철학자'의 모습을 한 군자 베스트 드레스로 불리는 멋쟁이 교장선생님이시다. 낙엽을 태우며 서 계신 모습이 경건함과 함께 인생의 고독함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할 듯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색의 시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제부터 낙엽 타는 냄새에 현혹된 탓에 염치 불구하고 그 분이 계신 앞쪽으로 다가갔다.
  "교장선생님! 낙엽 타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냄새 맡으려고 왔어요."
  아무 말씀도 없이 계속 생각에 잠기신 채 서 계신다.
  "교장 선생님!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는 행복한 추억을 남겨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먼 훗날 세상을 살아가다 힘들 때 행복했던 추억이 무척 큰 힘이 된다고 했어요."
  그냥 미소만 지으신 채 듣고 계신다.
  "저희반 아이들하고 은행잎 싸움을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신나 해요."
  '도둑놈 먼저 제발 저린다'고 수업시간에 아이들끼리 내버려둔 채 낙엽 타는 냄새나 맡겠다고 왔으니 궁색한 변명 아닌 변명부터 늘어놓을 수밖에……. 쉴새없이 종알대는 나의 이야기에 가끔씩 고개를 끄덕여 주실 때마다 수업과 교사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난 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와 함께 어린 시절의 향수에 젖었다. 우중충한 회색 도회지 생활에서도 자연은 한 순간이나마 느끼고 살라는 교훈을 준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고개 들어 바라다 본 아이들의 모습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 날, 낙엽 타는 냄새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교장선생님께 감사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여기에 고구마를 구워 선생님들과 함께 먹으면 맛있을 거야."
  혼잣말처럼 하시는 말씀과 동시에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향했다. 하루종일 온 몸에 낙엽 냄새를 풍기며 마주치는 선생님들께 낙엽 타는 냄새 맡아봤느냐고 약올리듯 너스레를 떨기도 하였다.
  다음 날 교장선생님께서는 태우는 낙엽 불 속에 고구마를 구워 전 교직원에게 맛과 향기의 낭만적인 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항상 베풀기를 좋아하시고 생활화하시는 그 분의 따스한 한 면이다. 삶을 관조할 줄 알고 그 가운데서 여유와 정을 베풀 줄 아는 귀한 마음을 배워보려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해마다 늦은 가을날이면 산자락 마을에 피어나던 저녁 연기의 따스함처럼 낙엽 타는 냄새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마음의 시간을 가져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