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추억-
열살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습니다. 손가락에 하얀 토끼풀꽃으로 만든 반지를 끼고 있군요. 홀씨가 잔뜩 부풀어 있는 민들레꽃대궁을 들고 있는 오른손이라서 하얀 풀꽃반지는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마치 그부분을 클로즈업 시킨듯이 말이지요. 환한 햇살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는 햇살에 부신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입을 모아 후, 민들레홀씨를 불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주변엔 봄꽃들이 조화롭게 들어와 앉았습니다. 아이 뒷편으로 약간 언덕진 곳이 있고 그곳을 온통 노란꽃들이 점령해 있습니다. 애기똥풀꽃과 양지꽃등 작고 노란꽃을 피우는 봄꽃들입니다. 그 사이로 너른 잎새 가득 햇살을 받고 있는 호박잎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살짝 호박잎에 그늘이 내려와 있네요. 언덕진 곳 위에 몇그루의 아카시아 나무가 내린 그늘입니다. 아이 주위로 제멋대로 자란 잡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아이는 쪼그리고 앉아 민들레홀씨를 불 태세고 아이가 앉은 뒤로 앉은 아이의 키만한 개망초가 자라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 앞으로 민들레가 지천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젠 희귀종이 되어버린 토종민들레가 잔뜩 꽃을 피웠습니다. 씀바귀꽃 색깔인듯, 엷은 노랑색을 한 민들레는 멀리서 보면 햇살때문에 하얀 색으로도 보였습니다. 제가 '앉은뱅이꽃'인 줄도 모르고 키를 멀대같이 키운 서양민들레에 비하면 우리 민들레는 키도 아담하고 꽃술도 훨씬 풍성한게 발길을 저절로 머물게 합니다. 그리 이쁜 토종민들레가 번식력이 왕성한 서양민들레한테 자리를 내주고 저만치 물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토종민들레를 발견하면 웬지 애잔한 마음이 들고 이렇게 라도 꽃피고 있어서 대견한 생각마저 들어 더 오래 들여다 보게 됩니다.
연노랑의 민들레꽃 사이로 벌써 꽃이 지고 꽃대궁 가득 홀씨를 달고 있는 것들이 눈에 띕니다. 아이는 그중 하나를 꺽어 후, 지금 막 입김을 불어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씨앗이 다른데로 날릴까 걱정 되어 땅을 향해 정성껏 홀씨를 날려 줍니다. 아이의 검지손가락에 풀꽃반지가 잠시 흔들립니다.
봄이 깊어가면서 토끼풀꽃이 길가 여기저기 피어나 있었습니다. 토끼풀꽃 줄기의 가운데를 조심스럽게 갈라 손가락에 묶으니 예쁜 꽃반지가 완성되었습니다. 후, 꼭 다시 싹을 틔우렴, 민들레 홀씨가 팔랑거리며 날아갑니다. 봄볕처럼 나른하고도 가벼운 몸짓 입니다. 찰칵, 엄마는 아이를 사진에 담았습니다.
-가을의 추억-
아이는 추운듯 몸을 웅크리고 있습니다. 쑥색 가디건의 촘촘한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고 그 위에 엄마의 것인듯한 숄 까지 덮어 썼는데도 말입니다. 베이지색 빵떡모자가 여전히 통통한 볼을 한 아이를 더욱 귀엽게 보이게 합니다.그 볼이 더욱 우묵합니다. 손에 든 마트용 커다란 과자 봉지가 보입니다. 무슨 소중한 보물인양 숄을 두른 아이의 품에 제 몸만큼이나 커다란 과자봉지를 껴안고 있습니다.
입이 반쯤 열려 있는걸 보니 아이는 과자를 먹다 사진에 찍힌듯 합니다. 멀리 가을빛이 아련한 양양의 미천곡 계곡에 단풍든 산이 겹겹입니다. 잡목으로 들어찬 산빛은 다양한 단풍색으로 풍요롭습니다.단풍색을 이르러 노랗다거나 빨갛다고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단순한 표현인지 미천골 계곡이 말해주고 있는것 같습니다. 아스라이 멀리 보이는 산의 푸르름과 산과 산을 끼고 흐르는 미천골계곡의 가는물줄기 까지도 풍요로운 가을색과 어울려 한폭의 그림이 되어 줍니다.
아이의 바로 뒤로 덩쿨나무의 빛깔이 유난히 빨갛습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진정으로 단풍색은 단풍나무가 아닌 덩쿨나무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말 역시도 미천골계곡에 들어서니 비로소 알것 같습니다.누른듯 붉고, 붉은듯 누르스름한 나무들 사이로 저 홀로 푸르름을 잃지 않고 당당히 서있는 나무는 전나무 입니다. 미천골계곡 따라 불바라기 약수터를 향해 트레킹을 하다보면 잘생긴 전나무 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그 키가 20미터이상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나무들 입니다.그 키가 어찌나 큰지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했을 정도입니다. 미천골의 단풍은 거대한 전나무의 푸르름이 있어 더욱 눈부신 색감을 보여 주는 듯 싶었습니다. 깨끗한 공기와 차가운듯 적당한 바람에 의해 탄생된 자연의 색감앞에서 아름답다는 감탄은 차라리 진부한 표현이었습니다. 말을 잃었었지요. 내 짧은 혀로는 도저히 미천골에 가득 들어찬 단풍빛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데 아이는 자꾸 앞만 보고 달려가곤 했지요. 여기도 보고 저기를 좀 보라고 애써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아인 잠깐 고개를 돌렸다 다시 앞만 보고 내달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산모롱이를 돌아선 곳을 뛰어가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긴바지를 입은 덕에 무릎팍이 조금 까진거 말고 다행히 다치진 않았는데 한번 넘어진 녀석이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넘어진 그대로 가만 있는 거였지요. 일어나라는 엄마의 재촉에 넘어져 있던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산이 그림 같아요' . 안그런것 같았는데 아이도 단풍든 미천골계곡을 눈여겨 보고 있었나 보았습니다.산이 그림같다는 아이의 표현에 옳다구나, 손을 마주쳤습니다.
그것은 단풍든 미천골계곡의 가을을 가장 적절하게 그리고 쉽게 표현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려한 단어로 혹은 화려한 문구로 설명하려 애썼던 내 고루한 생각에 신선한 일격을 가하던 명료한 문장,'산이 그림같다'는 표현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했습니다.
그길, 단풍든 산길을 걷다 산모롱이가 있고 넘어진 아이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들여다 보던 아스라한 그 길의 풍경이 찰칵, 가을의 추억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봄날의 추억속에 딸아인 푸른색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습니다.
가을의 추억속의 아들아인 빵떡모자를 쓰고 커다란 과자봉지을 안고 있습니다. 이 두개의 사진은 내가 일하는 내책상 유리안에 있는 유일한 사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