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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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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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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BY 빨강머리앤 2004-07-31

버스에 앉아 잠깐 졸았었다. 어제밤 늦게 잠을 잔 탓이고 아침 햇살이 너무도 따가운 탓이었다.

하지만 그 졸음도 오래 가지 못했다.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줄지어 올라오신다.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했더니 할아버지는 같이 올라온 할머니께 다시 자리를 양보하셨다.

'아이구, 고맙기도 해라' 할머니가 나를 보고 웃으신다.

당연한 일 일수도 있는 그 감사의 표현에 오히려 내가 감사한 생각이 든다.

노약자에게 당연히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버스를 함께 탄 젊은 사람의 도리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땐 정말이지 양보가 죽기보다 싫을 때가 있다.

오늘처럼 버스에서 한잠 잤으면 싶었을 때와 정말로 피곤했을 때다.

그럴 때면 젊은 사람으로서의 도리고 뭐고 그만 눈감고 자는 척 해버릴까 하는 불량양심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대도 자리를 양보하는 타인에 배려하는 마음을 작은 감사의 말로 표현하는 일에 인색한

어른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자리 한번의 양보로 내가 뭔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요행을 바라고 선행을 베푸는 꼴이 되고 말겠으나...

그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의 위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팽개쳐 버리는 어른을 보면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일이 다반사 인지라, 오늘 할머니의 웃음띤 얼굴로 건넨 고맙다는 인사가 새삼스럽게

내마음을 훈훈하게 덥혀 주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넉넉한 얼굴을 보니 그만 잠도 달아나고

여느 때처럼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주며 푸르름이 더욱 짙어진 여름숲을 바라보기로 했다.

 밖은 찜통더위, 숨이 헉헉 막힐정도로 기온이 높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냉방장치가 잘된 버스 안에서 보더라도 차도의 아스팔트가 품어내는

열기가 그대로 감지되는 듯한 날이었다. 버스의 남녀노소의 성비를 따질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아침 버스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눈에 많이 띠었다.

자연스럽게 하나둘 젊은 사람들이 노인네들에 자리를 양보하니 노인들로 버스하나가 가득찰 정도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에 타셨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노인대학에 가시느라

아침버스를 가득 채웠다고 하셨다.

내가 탄 버스가 아마도 노인대학 앞에 서는 모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마다 노인네들에

자리를 양보하는 양도 갖가지다. 노인분이 올라오면 앞뒤 쳐다볼 것 없이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씩씩한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이리저리 나 말고 누군가 자리를 비켜줄 사람이 있지 않나 살피는

새침한 아가씨도 있다. 내 자리인데 내가 왜 비켜 , 하는 식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앞만 보고 가는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노인네와 나이가 비슷한 연배의 어른이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도 있다.

앞좌석에 자리를 차지했던 젊은이 들이 하나둘 노인네들에 자리를 양보하고 뒷줄 몇개가 남은 상태에서

다시 노인분들이 올라 오셨다. 그러자 중년의 여인이 할아버지께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어섰는데

잠깐 사이를 비집고 초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여자아이가 냉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렸다.

그 아이의 엄마는 그래도 상식이 있는 엄마라서 아이들 나무랐고

그 틈에 멋쩍은 할아버지는 저쪽으로 비켜 서서 가셨다.

요 비위 좋은 여자아이는 엄마의 무안한 표정을 못 본채 제말을 계속한다.

 '엄마, 지금이 봄이야 여름이야?' 

 '이렇게 더운데 지금이 여름이지, 봄이니?' 엄마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데 여자아이의 말은 계속되었다.

' 엄마, 나는 가을이 제일좋아.

여름은 너무너무 더워서 싫고 겨울은 너무너무 추워서 싫고.. 나는 가을이 좋아' 

여자아이 말마따나 너무너무 더워서 싫은 여름이 지금 밖에서 절절 끓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언제쯤 깨닫게 될것이다. 이 짙은 녹음의 계절도 나름대로 이유있는 모습으로 절절 끓고 있음을.

그리고 좋아하게 될것이다. 절절 끓는 듯한 가마솥 더위속에서 가장 강렬한 생명들이

열매를 맺고 튼실하게 살찌워 가는 여름을...

창밖에 하나둘 꽃들이 보인다. 내가 양보한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창밖의 꽃을 보며 중얼거린다.

'무슨 나무가 저렇게 꽃을 피웠나?' 그꽃은 능소화였다.

능소화는 나팔꽃처럼 기는줄기여서 저혼자 서지 못하는 까닭에 주변에 뭔가 감고 올라갈것이 있으면

그것을 타고 올라가는 성질을 지녔다. 창밖으로 보이는 능소화는 마침 곁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휘감고 꽃을 피워 마치 나무가 주홍빛 꽃을 피운듯 보였던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크리스마스 츄리에 꼬마전등을 감아올리고 불을 켜듯한 모습이었다.

 능소화가 자신의 몸을 친친 감고 올라와 답답할것도 같은데 꽃을

 피운 능소화와 껴안고 자라는 나무도 행복해 보였다.

 능소화의 꽃빛은 주홍색, 강렬하게 쏟아지는 여름햇살을 닮았다.

태양을 닮은 꽃 능소화는 그래서 한여름의 정열적인 햇살 속에서도 저리 당당하게 고운가 보았다.

 태양을 닮은 꽃들이 하나둘 차창을 스쳐 지나간다.

원추리와 나리꽃도 주홍빛으로 붉다. 늦게 피어난 장미꽃도 주홍빛으로 피어 있는걸...

자고로 태양의 계절이다.

한시간여의 짧지 않은 시간동안이었지만 그만하면 서서온 보람이 충분했다.

햇살 닮은 주홍빛 꽃들을 만나는 순간이 나쁘지 않았으니.

그만하면 여름이 참 아름다운 계절이구나 싶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