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여왕이라는 오월이 열렸는데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비가 자주 내렸었다.
오랫만에 맑게 갠 일요일아침,'철쭉 축제'가 한창인 서리산 철쭉꽃이 지난주에 절정이었다는 소식에 서둘러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섰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남아있는 철쭉을 볼수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서..
몇번을 다녀본 익숙한 길이 정겨웠다. 자주온 비 뒤끝에 초록으로 무장한 산들의 푸르름이 절정에 달하고 마침 쏟아지던 햇살에 싱그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초록으로 뒤덮인 세상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가득 저 깊숙한 곳까지 초록의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까운 풀밭엔 노란애기똥풀꽃이 무더기로 피어나 초록색과 예쁜 조화를 이루고 물이 가득찬 무논엔 여기저기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서둘러 나선탓에 오전 8시 30분경에 산입구에 도착해 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가롭기 그지 없다. 서두른 보람이 있었구나, 싶었지만 토요일인 전날 심야영화를 보고 온 탓에 제대로 잠을 못잔 몸이 과연 서리산정상까지 잘 견뎌 줄수 있을지 걱정 스러웠다.
아이들은 늘상 씩씩한 모습 그대로 앞서가는 발걸음에 활기가 넘친다. 음료수 하나씩 챙기고 초록빛 세상으로 들어갔다. 목하, 녹음은 이미 완성을 마치고 활엽수는 활엽수대로 침엽수림은 침엽수림 대로 깨끗한 새잎을 돋워 산은 만산(滿山)이다.
입구쪽에 나란히 선 '독일가문비'나무가 이국적이다.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았던 잣나무에도 여린새잎이 돋아나 있다. 서리산 입구 옆에 산림휴양관이 멋지게 들어서 있고, 휴양관 돌계단엔 여러가지 우리꽃을 심어 두었는데 지금 금낭화가 한창이었다.바위틈에 싱싱하게 돋아난 금낭화는 언제 보아도 참 예쁜데, 이곳은 금낭화를 흔하게 볼수 있는 몇안되는 장소중 하나다. 이 동네 사람들은 뒤란이나 화단에 금낭화 한두 그루를 심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노랗고 하얗고 보라색인 붓꽃은 아예 꽃밭을 조성해 두었다. 신비한 보라색의 붓꽃은 자꾸만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주었다. 그래서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는 그길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붓꽃을 지나, 침엽수림이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벌써부터 피톤치드가 가득차 있는 숲의 기운이 느껴진다. 온 몸을 열고 심호흡...
너무 빽빽히 들어선 잣나무 소나무를 벌채를 했는지 군데 군데 나뭇단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 아래, 청정한 야산에서만 꽃을 피운다는 이름도 이쁜, '모데미풀'이 둥글게 모여있었다. 이미 꽃은 졌지만 옹기종기 어깨를 겯듯이 모여있는 모데미풀은 침엽수림으로 어두컴컴한 숲길에 홀로 자라있어 고상한 이미지를 주었다.
올라오는 첫관문 부터 제법 가파른 등산로지만, 그 사이로 쉴새없이 펼쳐지는 자연의 축제는 수많은 꽃들과 모양도 갖가지인 연초록 나뭇잎을 불러 들여 다리 아플새도 없이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떡갈나무 어린잎을 파란하늘에 비춰보다, 청미래나무 새잎의 둥근모양은 참 앙증맞기도 하다며 발길을 늦추니 앞서가는 아들녀석 얼른 올라오라고 성화다.
이제야 조금씩 알것 같은 자연의참맛, 그것은 화려한 꽃들못잖게 새잎이 피는 나뭇잎에도 있음을 산은 일깨워 주고 있었다. 침엽수림이 끝나는 곳부터 본격적으로 가파른 숲길이 펼쳐지고 군데군데 바위덩이가 자리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하는 길이다.
쉽지 않은길,뒤에 처진 딸아이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생전 처음 듣는 새소리가 귀를 잡아끈다. 이름으로만 들었던 '휘파람새'다. 첨엔 앞서가는 사람이 휘파람을 분다고 생각할 정도로 꼭 사람이 소리내는 휘파람하고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소리는 줄곧 우리를 따라와 철쭉동산 정상에 이르러서야 그쳤는데 생각해 보니 휘파람새가 길잡이를 자청하고 배경음악이 되어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다고 하소연 하던 딸아이도 휘파람새를 흉내내며 아무일 없다는듯 잘도 오르고 드디어 정상을 저만치 남겨둔 싯점에서 연분홍 꽃터널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곳에서 부터 '서리산 철쭉동산'. 이미 떨어진꽃, 지금 피어있는꽃, 아직 피지 아니한꽃... 그 꽃빛은 한결같은 연하디 연한 분홍색이었다. 높은봉우리, 정상가까이에서 핀 산철쭉의 연한분홍빛이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그빛이 진한 분홍이었더라면 서럽다는 감정은 없었을 것을... 그 높은 곳에 산철쭉은 어쩌자고 연하디 연한 분홍색이었는지,, 떨어진 꽃들이 꽃마당을 펼치고 산철쭉이 피어있는 산정상은 한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그려놓은듯 아름다웠다.
안보았으면 후회할뻔, 했구나.. 휘파람새를 대신해 멀리 꾀꼬리가 화답한다. 여름이 멀지 않았고, 다음주엔 서리산 철쭉도 그 연한 꽃빛을 거둘거라고..
정상에 옹기종기 산을 탄 사람들이 모여앉아 김밥도 먹고 물로 목을 축인다.산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다 가족같은 느낌이 든다. 아이들은 정상에서 만난 어른들에게 칭찬을 담뿍 받고, 산의 정기도 넘치게 받아 얼굴가득 생기가 돌아 볼이 발그레하다.
내려오는 길, 올라오는 이들과 나누는 한마디 인사가 정겹다. '안녕하세요?'내려가는 길이 교통체증을 빚을 정도로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다.'조금만 더 가면 철쭉꽃을 볼수 있을 거예요' 보고 또 보고도 아쉬워 다시 뒤돌아 보게하던 철쭉동산의 분홍꽃들과 내년을 기약하고 내려오는 길, 다시 휘파람새가 휘리리릭, 휘파람을 불었다.
오랫만에 얼굴을 드러낸 햇살이 산길에 나뭇잎에 골고루 뿌려주고 병꽃나무 자주색꽃이 나무사이로 드러나 인사를 해온다. 꽃눈이 펄펄 날리는 곳에 앉아 딸아이와 사진을 찍었다.꽃눈을 날려 때아닌 눈꽃세상을 만들어 놓은 나무는 '산배나무' 한그루였다. 병꽃나무도 만나고 하얀꽃비를 뿌리던 산배나무도 만나고 계곡물 소리 우렁찬 나무다리를 건넜다.
이곳은 상수원보호구역, 놀고 싶어도 계곡물에 들어갈수가 없다. 물에서 놀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휴게소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매점앞 화단에 봉숭아 어린싹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작년여름, 그 화단에 탐스럽게핀 봉숭아를 따다 손톱을 물들인 일이 있어 화단에 돋은 봉숭아 어린잎도 반갑다.
아저씨에게 어린싹 몇개만 가져가고 싶다고 부탁하니 두개만 뽑아가란다.두개만 뽑으려는데 세뿌리가 달려 나온다. 집에 오는대로 빈화분에 봉숭아 어린싹을 심고 물을 흐북하게 주었더니 오늘아침 싱싱하게 줄기를 세우고 있다. 산의 정기를 받은 녀석들이니 아마도 굿굿하게 잘자라 여름엔 이쁜꽃도 피울것이다.
봉숭아꽃이 필때 즈음해서 다시한번 서리산을 올라 보리라. 매점 아저씨한테 잘키운 우리집
봉숭아도 자랑해야지. 매점을 벗어나 마을에 접어드니, 옹기종기 들어 앉은 산아래동네 집집마다 함박꽃이 꽃축포를 터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