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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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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혹은 사랑


BY 빨강머리앤 2004-01-16

프랑스 영화'노보'를 보았다. 사랑에 관한 영화였다.노보를 보고 나서의 느낌은 뭔가 불확실 하면서도 강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새삼스럽게 반추해 보게 되었고 순수한(영화 제목인 노보의 뜻) 사랑이 보여주는 원초적 아름다움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살피면 대강 이렇다. 그래함이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모든 기억을 잊어 버리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 그의 기억의 한계는 10분이다. 그래서 그의 손목엔 항상 수첩이 달랑 거린다. 잊어 버리지 말아야 할것을 하나씩 적어나가는 그의 수첩은 그의 현실을 알려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아침에 출근을 해서 어떤 길을 걸어 회사에 왔는지 적어야 집으로 돌아갈수 있는 그의 수첩엔 집근처 약도며 그가 걸어다닌 길에 대한 모든 내용이 빼곡이 적혀 있다. 또한 잊지 말아야할 사람들의 이름이 거기 적혀 있고 오늘 하루 해야할 아주 사소한 일상 들이 또한 수첩에 적혀 있다. 그래함을 고용한 사장 사빈나는 희귀 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래함에게 가장 간단한 회사업무인 복사일을 맡긴다. 또한 자신만의 은밀한 장소로 그래함을 불러 날마다 신선한 피를 수혈받듯 그와의 섹스를 즐긴다. 사빈나는 희귀기억상실증에 걸린 그래함이 혹 길을  잃을까봐 그의 곁에 친구 프레드를 붙인다. 원하는 원지 않든 그래함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은 프레드를 의식해야 만 하고 의지 해야만 한다. 이 회사에 아름다운 여사원이 입사를 한다.그녀의 이름은 이렌느.... 이렌느는 그래함의 순수한 영혼에 이끌려 그를 사랑하게 된다. 기억을 저장할수 없으나 사빈나와의 관계에서 느낄수 없었던 강한 이끌림으로 이렌느와 사랑을 나눈다. 이렌느는 그래함의 기억을 되돌려 주고자 노력한다.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기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래함의 가슴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한다. 날마다 새로운 기분으로 처음처럼 사랑을 나누는 그래함과 이렌느는 서로의 눈길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다.그런데 이들을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빈나가 이렌느를 해고시켜 버린다. 그리고 프레드를 시켜 그래함의 수첩을 빼앗는다.  이름모를 거리에 버려진 그래함이 둔중한 뭔가에 부딪혀 넘어지면서 다행스럽게도 의식을 조금씩 되찾는다. 자신에겐 아름다운 아내가 있고 앙투안이라는 아들이 있다.하지만 그의 아내는 친구 프레드와 사랑에 빠졌으므로 그녀는 그래함  아니, 파블로(그래함의 원래 이름)의 기억이 돌아오는걸 바라지 않는다. 그의 기억이 되돌아 오는걸 바라지 않는 사람들, 사빈나, 그의 아내그리고 프레드는 여기서 '순수한 영혼'과 거리가 멀게 보인다. 그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이렌느와 앙투안의 이미지는 노보하다(순수하다).마침내 기억을 되찾은 파블로가 찾은 곳은 바다였다. 태초의 인간 내지는 어머니로 부터 막 생명을 부여받은 순수한 영혼을 암시하듯 파블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파블로가 갓난 아이처럼 웅크린채 누워있는 사구의 하얀 모래는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였으며 ,멀리 파도치는 바다는 생명수 였을까... 아무런 감정의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순수한 생명이 눈을 뜨자, 그곳에 아들이 와있다. 둘은 파도처럼 깔깔거리며 웃었다. 저녁이 깊어가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파블로의 영혼은 새로운 순수로 거듭날것 같은 느낌위로 태초의 저녁이 저물어 가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 안의 나'를 들여다 보기 위해 나는 여러겹의 나를 들추어야 했다. 감춰지고 억매인 내 감정의 조각들이 여기저기서 아프게 튀어 나왔다.그것들이 새삼스럽게 낯설다는 느낌이 들어 서글펐다. 

어릴때 부터 줄곧 받아온 주입식 교육 탓일수도 있고, 우리 정서상 참는게 미덕인 관습탓일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내 성격 탓일수도 있었을 테지만, 나는 피해자만 같았다. 내 감정의 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가 그토록이나 어렵단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지금 새삼스럽게 자유의지를 펼수 있는 날개가 있었기나 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니...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이 영화가 주는 여운이 뭔가 한참 생각을 해 보아야 했을 정도로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다만, 순수한 감정을 발산하는 일을 아주 오래동안 잊고 살았다는 느낌, 순수하게 다가가는 사랑, 순수하게 다가가는 우정을 지켜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좀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영화가 가르쳐준 신선한 이미지를 생각하자 양쪽 어깨죽지 아래 부분에서 약간의 간지러움이 느껴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