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상습 교통 체증을 뚫고 할머니 병문안을 다녀 오느라 늦게 잠들었던
아이가 일찍 일어나 소파에 몸을 누이고 책을 읽고 있었다. 밥솥을 가스렌지에
올리고 다시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 꿈길인지 어딘지를 헤매고 있었는데
딸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엄마, 눈이 와~'
어제 차를 타고 가면서 '대설'이라는
말을 설핏 들었던것 같다. 눈이 오지 않는 대설에 차를 타고 가면서 멀리 00리조트에
인공눈을 뿌리는걸 봤었다. 날이 추우니 인공눈 만들기 좋을것 같은 날씨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12월 중순이 넘어가는데도, 대설이라는 절기가 지나가는데도 아직 첫눈이
내리지 않은 하늘을 무심히 쳐다 보았었다.
하늘은 멀쩡하게 파랬었다.잎떨군 겨울나무 사이로
비춰오는 파란하늘이 눈이 부셔 눈을 감았어야 할 정도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손모자를
한채로 한겨울에 펼쳐진 파란하늘을 눈부시게 바라보다 문득 손가락 끝에 남은 봉숭아
꽃물을 보았다. 위태롭게 손톱 끝에 매달리듯 붙어 있는 봉숭아꽃물을 보며 올해처럼
간절히 첫눈을 바랬던 적도 없었다고 생각했었다.
첫눈이 내리면 '첫사랑'을 기억하는 낭만적인 감상도 한번쯤은 용서를 해야지
하고 한껏 너그러운 맘을 가져 보기도 했었는데.....
처음 암선고를 받은 그때에 비하면 어머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담담해져 있다.
그건 어쩌면 체념일수도 있고, 그간에 발을 동동 굴려가며 안타까워서 이리저리
헤매다니던 몸과 마음이 지친 탓일수도 있겠다고 변명을 해본다.
처음 병원에 누워 계시던 어머님의 초췌한 모습이 주던 충격을 어느정도
인정하는 결과일수도 있겠다.
다행히 어머님은 자신에게온 병마와 잘 싸우고 계시는듯해
보인다. 아직 정확한 병명을 모르지만 한가지 그분이 알고 있는건
자신의 평생을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타인에 의한 불확실한 삶에 쫒겨
살아온 고통의 세월이었으며 그것들이 한으로 싸여 가슴에 불같은 덩어리 하나가
들어와 앉았다는 사실. 가슴이 답답하시다고, 손을 들어 올려 이 손만한
불덩이가 가슴께에 들어 앉아 그것이 나를 이토록이나 답답하게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그분의 눈에 삶의 회환이 깊게 서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의뭉스런 구석이 당신 생각으로도 너무 많은것
같아 한번은 의사 선생님께 여쭈었다 하셨다. 지금으로선 병원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 그것이라고 하셨다며 아무래도 어머님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 밖에 없으시다고 체념섞인 한숨을 내쉬셨다.
바람이 몹씨 불고 날이 차가운 하루였었다. 한차례 그렇게 세찬
바람이 훑고 가더니 드디어는 대설을 하루 넘기고 눈이 내렸다.
탐스런 함박눈이었다. 시린발을 종종 거리며 한동안 베란다에
북박히듯 그렇게 서서 아이들과 올해 처음 내리는 눈을 감상했다.
눈송이들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치 춤을 추듯 원을 그리기도 하고
한바퀴를 돌아 지상으로 낙화했다. 군무였다. 작은 것들은 끈임없이
몸을 움직여 각각의 몸짓을 보이며 아래를 향해 가감없이 몸을 날리며
세상을 하얗게 장식하고 있었다.
함박눈은 곧 쌓여 첫눈이 만들어 내는 하얀세상을 보여 주었다.
멀리 산길이 도드라져 보인다. 인적이 드문 그곳에 내려앉은 눈은
행복할것 같았다. 오래 오래 그 하얀 산길은 내린 그대로 첫눈의 흔적을
남겨 둘것만 같았다. 지붕이랄것도 없어 아파트에는 눈길을 아니주고
멀리 바라보았다. 산아래 동네 작은집 지붕에 하얗게 쌓인 눈은 애잔한 그리움
같은걸 불러 일으킨다. 아파트 한켠 놀이터 모래밭에도 곧 하얀 눈밭이 되었다.
얼마전까지 주홍빛 고욤열매가 먹음직 스럽게 달려 있었으나
한 할머니와 손주뻘 되는 아이가 함께 다 따간 빈 고욤나무에도 조금씩 함박눈이
더듬이를 뻗듯 하나씩 가지 끝에 내려가 앉았다.
고요와 평화로운 아침 정경.. 첫눈이 주는 그리움의 정체는 고요와 평화였음을
비로소 보았다. 고욤나무끝에 내려와 불안한듯 흔들거리던 한송이 눈을 보면서.
오리털 파카에 모자에 장갑까지 중무장을 하고 나선 아이들은
벌써 부터 눈싸움을 할생각에 눈사람을 만들 생각에 들떠있었다.
오늘 학교 끝나고 눈싸움 하고 와도 돼? 묻는 아들녀석.
눈사람 만들어 냉동실에 넣어 두면 안될까? 생뚱한 질문으로 웃게 만들던 딸아이.
그냥 학교에 가지 못하고 기어이 눈을 뭉쳐 누나한테 던지는
아들녀석의 모습을 보며 문을 닫았다.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는가 보았는데 라디오에서 눈을 생각나게 하는
음악들을 들려 준다. 'snow dance' ,'A winter story' ......
갑자기 해가 난다. 부드러운 햇살이 눈내린 세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베란다에서 시들어 가던 국화꽃잎에 내린 눈이 녹아가는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있다. 눈이 녹아간다. 아까운 첫눈... 우리 아이들 눈사람 만들눈이
녹아 내리고 있다. 한겨울 밤의 꿈도 아니고 . 함박꽃처럼 내린 눈이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에 녹아들어 가고 있구나.
눈내린 한때 아름다운 하얀세상을 연출한 저산너머로 크게 소리를
질러 보고 싶다. 손나팔을 만들어 '오 겡끼 데스까?'... 그대, 잘 있는지.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