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내가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산봉우리가 전해주던 아침분위기를 돌아다 보지 못했다.안개가 조므락하게 끼어있던 농가와 그 사이로 불쑥 불쑥 솟아있던 포플러 몇그루와 청록의 측백나무가 전해주던 평화로운 아침정경을 마주한지 오래 되었단 생각이 들어 오늘은 일부러 찬바람이 불어오는대로 베란다 문을 열고 한참이나 밖을 바라다 보았다.
하늘이 뿌옇다.
엷은 회색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송일 하늘하늘 날려 보낼듯 잔뜩 구름이 끼어 있다. 눈이 올것만 같은 날씨가 있었다. 바람의 결은 느껴지지 않는데 어딘가에서 찬기운이 슬몃 끼어들것만 같아 자주 쳐다보게 되는 하늘은 엷은 회색구름이 뭉텅져 있던 날. 오늘이 꼭 그렇다.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싫어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내려 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으로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그도 아니면 환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상대적으로 우울한 내 심사를 햇살바늘이 아프게 찔러 나를 울게라고 했으면 좋겠다 싶기도 하다. 목울대까지 수분기가 꽉 차올라서 이 물기를 다 뱉어내고 싶기도 하고 물에 불은 솜처럼 하냥 밑으로 가라앉고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김장을 해야겠어서, 그래도 겨울은 잘 나야겠어서 언니한테 도움을 요청했다. 안산사는 언니가 나름대로 열심히 사느라 바쁜줄 아는지라 미안한 마음을 실어 전화를 했더니만 흔쾌히 그러마 했던 것이다.한시름 덜고, 이번주에 김장을 해야 겠구나... 김장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가야 겠다싶어 친정엄마가 남녘의 볕으로 욕심껏 일광욕을 시키신 마늘부터 까기로 했다.
부엌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양푼가득 수분기 하나 없는 마늘을 담고 껍질을 벗기기 쉽게 하기 위해 물을 한바가지를 붓고는 마늘을 까기 시작했다. 매년 이맘때면 수분기가 부족한 손가락 끝이 갈라지곤 했는데 올해도 여지 없이 손가락 끝이 갈라져 마늘을 손질하기가 영 수월찮다. 마늘은 손질하면서 내내 어머니 생각이 났다.
마늘은 보내주신 친정엄마가 아닌 아파누워 계시는 시어머니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한번씩 오시면 마늘을 까서 정리를 해 주시곤 하던 어머니. 그분이 무릎을 세우고 부엌한켠에 앉아서 마늘을 까고 계시던 모습이 왜이리도 선명하게 기억되는지...
사실은 요즈음 그렇다. 무슨일을 하든 그것이 반드시 어머니의 모습과 연결이 되곤 하는 것이다. 찬장에 그릇들을 포갤때면 싱크대 선반이란게 생각보다 견고하지 못하니 그릇들 너무 많이 얹어 두지 말라는 말이 떠오르고, 아침마다 마시는 커피건만,커핏물이 끓고 커피를 타다가 문득, 몸에도 안좋은걸 뭐하러 그렇게 마시려 하느냐는 가벼운 꾸지람이 들리는듯하는 식으로.
욕실에 털푸덕하니 앉아 손빨래를 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빨래를 하다가 가벼운 한숨을 쉬고 있는 내모습을 발견하는 요즈음이다. 나의 이런모습들이 결코 바람직하다 할수가 없을것 같다. 그로 인해 우울이 깊어가는 요즈음의 내가 밉기도 하지만,한편으론 내 스스로에게 위로의 손길이 되어 등을 다독여 주고도 싶다. 그래, 너에게 다가온 인생의 큰고비하나 넘고 있으니 네맘 이해가 가. 너무 애쓰려 하지마. 지금 그모습 그대로 조금씩만 앞으로 나아가렴. 그러다 보면 네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길에 당도해 있을 테니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 있을 테니까...
그래.. 지금은 시작이다. 시작부터 지치면 안되고 남편의 살가운 가지 하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벌써 지치면 큰일이니 말이다. 다만, 지금의 내 방황의 한켠에 두려움처럼 뭔가 풀리지 않은 어려운 숙제처럼 자리하고 있는것이 있어 내 마음자리를 안주할 의자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의 병명을 당신에게 알려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남편과 나의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내 생각은 당신께 정확한 현실을 알리고 당신의 의지대로 남은 인생을 설정할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쪽이고,남편은 절대 쉬쉬해야 하는다는 쪽이다. 당신이 그 일을 아시면 그 충격이 너무 클것이 두렵다는 게 남편의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동안 타인의 뜻대로 이끌려 자신의 의지를 펴볼 엄을 못내본 어머님의 삶을 끝까지 그런식으로 마감하게 한다는건 어머니의 자유의지를 폄하하는 일일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신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그분 나름대로 평화와 안식을 얻는 방법을 얻는 귀한 시간이기를 나는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님이 종교에 귀의하는것도 한 방법이 될것 이란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과 현실과의 비끄덕 거리는 괴리를 종교가 메워주지 않을까 싶어 지금이라도 어머님의 정확한 현실을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신께 의지하는 것도 평안을 얻는 방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편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내 생각을 듣고는 '네 어머니가 아니니 그런식으로 말한다'고 그랬던 남편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나도 누워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오는 날은 어머니의 퀭한 모습이 자꾸 어른거려 잠을 설치곤 하는데 하물며 남편이라야..
한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을 다 보아온 남편으로선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어머니의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회피하고 싶은 지도 모른다는걸 감안해야 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아픈 현실을 아프게나마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사실은 어떤게 잘하는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형식적으로 비슷한 환경에 처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십인십색으로 다 다른 견해를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종합해 보면 그래도 본인에게 정확한 현실을 알리고 환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게 가장 현명한 방도 인것 같은데... 내 답답한 마음을 들여다 봤는지,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 구름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