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모든 색채가 드러나는 계절이다.
산꼭대기를 물들인 단풍이 조금씩 산아래를 향해 걸음질 쳐오며
날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산빛을 바라보며 사는 기쁨. 그리고 그 기쁨의
이면에서 조금씩 고개를 드미는 세월의 흐름이 주는 쓸쓸함으로
오늘 아침도 한참이나 베란다 유리창에 기대서서 앞산자락을 들여다 보았다.
봄이면 따뜻한 남쪽에서 시작된 봄꽃들의 개화시기를 미리 분포도를 통해 볼수 있듯이,
가을이면 추운 북쪽에서 부터 시작된 단풍소식이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는 분포도를
또한 일기예보를 통해서 보게 된다. 시속으로 표현하자면 몇킬로,,, 운운하며 꽃이 피는
속도를 수치화 시키듯이 단풍이 내려오는 속도 또한 수치화를 시켜보고 싶게 만드는
요즈음... '겨울이 온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안다'고 추사는 세한도
한켠에 글로 써놓았다.
나는 지금, 단풍으로 날마다 변하는 산빛을 바라보며 '단풍이 들고 나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걸 안다'고 바꿔 말하고 싶어진다.
멀리 산봉우리와 그 아래 부드럽게 흘러내린 산능선에 내린 가을빛에 굳이 시선을 주지
않더라도 주변만해도 벌써 단풍든 나무들로 울긋불긋하다.
벌써 온통 노랗게 물들어 버린 은행나무는 잎새를 한두개씩 떨어뜨리고 있다.
느타나무는 이제막 정성껏 화장을 마치고 나보란 듯이 노랗게 새단장을 하고 있다.
벗나무의 빨간잎새도 곱다. 가지끝을 살짝 붉혀오더니 하늘을 향한 쪽, 햇살을
상대적으로 많이 흡수한 쪽으로 반쯤 붉게 색을 칠하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것 같다.
갈잎으로 변한 프라타너스의 커다란 잎새는 바람이 불때마다 나풀 나풀 날려 거리를
떠돌고 있고, 밤톨만한 프라타너스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프라타너스 열매를 바라보자니 초등학교 시절 개구장이 였던 남자아이가 떠오른다.
한번 맞으면 되게 아팠던 프라타너스 열매를 서너개씩 들고 다니면서 여자아이들을
위협하곤 했던 아이. 두개를 빙빙돌리며 여자아이들 앞으로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던 아이들을 보며 승리의 미소를 짓던 개구장이 그애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 아파트 옆, 상가로 이어진 작은 길을 나는 사랑한다.
오십여미터나 될까? 그길에 전나무가 몇그루 심어져 있다. 여기로 터전을 옮기고서
알게 된건, 전나무 잣나무 그리고 소나무등, 상록수들이 참 많다는 사실이다.
전나무 하면 이국의 정취속에서나 떠오르던 내 주변엔 흔히 볼수 없던 나무였다.
그 전나무가 작은 군락을 이루고 바로 내 옆에서 늘 나와함께 숨쉬고 있다.
그건 참으로 복된 일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장을 보기위해,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
상가를 갈때마다 전나무가 전해오는 그 시원하며 산뜻한 느낌이 틀별했었다.
그래서 다른길도 있는데 굳이 그길을 돌아서 오곤 했다.
주변의 단풍나무며 은행나무 벗나무와 느티나무가 노랗고 빨간 색으로 가을단장에
열심인 반면
그 길의 전나무들의 여전히 굳건하게 줄기를 키워가며 늘상 푸르름을 전해 준다.
그것도 가을이라 잎새끝에 조금씩 갈빛을 머금고 있긴 하지만 바람이 불고
찬기운이 아침저녁으로 세상의 모든 빛을 바뀌고 있을 때에도 전나무의 그
당당함은 과연 푸르른 기상을 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전나무의 푸른빛도 가을의 단상에 기꺼이 끼워 주고 싶다. 그 역시도 빛나는 가을햇살을
살갑게 받아들이는걸 보았기에 말이다.
때때로 붉거나 노랗거나, 또는 갈빛을 머금은 연한 초록빛나는 가을나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르곤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사계절을 온몸으로
살아가는 나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른봄 늦잠을 자고 있는 꽃사과 나무를 종달새가
삣종 거리며 잠을 깨우면 하품을 하며 깨어나는 꽃사과는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가지끝에 날아든 붉은뺨멧새 부부에게 둥지를 지을 가지를 내어 주기도 하며 새와 나무는
서로가 가진 것들을 나눠가지면서 부지런히 여름을 난다. 여름을 잘 보낸 어느날,
바람이 여기저기서 날아와 잎사귀 마다에 앉아 색칠을 시작하는 이야기.
바람은 모든 이쁜 색깔의 크레파스로 잎잎마다 색칠을 한다음, 별무늬도 그리고
동그라미에 하트 그리고 인디안 깃털을 그려 넣는다. 분홍빛 별이 반짝이는 잎새
해님이 내려앉은 단풍잎새들이 아이들 책속에서 곱게 펼쳐져 있던 그 동화책이 있었다.
동심의 눈으로 보면 가을은 바람이 잎새에 그리는 그림들인것이다.
가을을 표현하는 그렇게 멋진 표현을 내 어디서 볼수 있었을까?
오늘밤은 아이들이 잠들기전 한동안 꺼내보지 않았던 그 책을 꺼내서 함께 읽으며
가을밤을 잠들고 싶다.
창밖에 펼쳐진 가을빛에 눈이 시린날, 가을이 주는 단상에 함뿍 젖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