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밤을 유난히 좋아해 늘 이맘때엔 밤을 자주 사다 먹곤 했었다.
그런데,
올핸 수확기에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밤의 작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다른 작물도 비슷하겠지만, 우리나라 산 어디를 가도 한두그루씩
눈에 띄게 되는 올해 밤은 알도 잘고 벌레의 습격이 유난히 많은 해였다고.
안그래도 장이 서는날,일부러 밤을 사러 갔다가 그냥 온적이 있었다.
지난해 한되에 삼천원 했던게 올핸 이천이 오른 오천원이랬다.
며칠전에 조금 잘다고 생각한 밤을 늦은 밤 사다 놓고 보니 온통 벌레먹은
밤이어서 실망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직접가서 밤을 딸 시간적 여유도 없고 굳이 그렇게 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사실은 조금만 시내를 벗어나도 곳곳에 산이 있고, 그 산엔
밤나무가 있게 마련이라 망태기 대신 까만비닐봉지라도 들고 나서면
밤을 못딸 이유도 없었지만, 주민들 얘기인 즉슨, 서울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수확할만한 밤을 벌써들 다 따가고 없다고 했다.
산밤이야 주인이 따로 없을 테지만, 엄밀이 말하면 그 주인없는 산밤도
그곳에 거주해 사는 주민들이 바로 주인공이 아닐까, 그러니 양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민들이랑 공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금은 남겨두는 여유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건 어디 까지나 그럴수 있다면 하는 바램뿐이고, 현실은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밤이 익기도 전에 벌써 부터 가지를 들쑤셔 놓은 성급한 이들서 부터
아예 자루째 들고와 밤을 싹쓸이 해가는 밤서리팀까지 합세해
동네에 남아나는 밤이 없다고들 했다.
가을, 온갖 과실이 익어가는 계절, 누군들 그 수확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주인없는 산야의 밤이라고 싹쓸이를 하거나 밤을 가지째 꺽어서
다음해 밤 작황에 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하는 그런 몰염치한 행동을 자제해
주었으면 한다는게 그들의 전언이었다.
그러니 나까지 그대열에 합세하고 싶은맘이 없을 뿐더러
생각해 보면 산에서 열리는 밤이며 도토리며, 산열매들의 주인은 실상
인간이기 보다 숲속에서 나무와 공존하며 살아가는 동물들이 주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인간들이 산열매들을 싹쓸이 하는 바람에 다람쥐며
산새들 먹이가 부족하다는 기사를 읽고는 씁쓸했던 기억도 있다.
딸아이가 '밤'얘기를 할때마다, 그래 한번 사오마 했던걸
바쁘단 핑계를 대고 혹시 괜찮은 가격에 좋은밤을 만나면 그때 사와야지 하면서
뒤로 미루고 있었던 중이었다.
외동인 남편에게 '형' 대접을 깍듯이 하는 방글라데시 청년. 그가
벌써 세번째 밤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그가 일하는 공장 앞, 개울이 얕게 흐르는 개천옆에 한그루의 꽤 큰 밤나무가
있단다. 잘 익으면 따야지 생각하고 아껴두었는데 모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주인없는(?) 밤을 따가지고 가버려서 속상했단다. 그래도 밤나무는 숨겨둔
밤송이를 몇개 익혀놓았고, 그는 우리 아이들을 초대했었다. 함께 밤을 따자고.
어릴적 아버지랑 밤을 따곤 했던 추억을 생각하며 나도 꼭 따라 가고자
했건만, 결국은 남편과 아이들만 자전거 타고 룰루랄라, 밤따러 가고 ...
그날밤, 초등학교 1학년생인 아들이 일기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제목: 밤을 따러 가다.
나는 아빠랑 누나랑 밤을 따러 모란공원에 갓다. 거기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내리막길도 가고 위로가는길도 가기도 했다.그래서 마침내 밤나무를 찾았다.
난 긴 막대기로 밤을 따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방글라데시청년)가 오시더니
나무에 올라가서 그 막대기로 밤송이를 내려쳤다. 수많은 밤이 내려왔다. 밤을 다
딴뒤 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오,마이갓' 난 밤이 조금 밖에 없는줄 알았는데
40개가 넘어 있었다.'
아들녀석은 그런 일기를 쓰고 선생님으로 부터 가장 높은 점수인 '별 세개'를 받아왔었다.
('수많은 밤이 내려왔다'는 과장된 표현임)^^
방글라데시청년의 이름은 무닐, 그렇니까 무닐이 두번째 밤을 가져온건
지난주였다. 밤을 맛있게 먹었다는 형수님 말에 꼭 다시한번 밤을 따다 드려야지
생각했다며 공장 뒤쪽에 있는 산에 올랐다고 했다.
그가 따온 산밤은 알이 유난히 잘았다.들쑥 날쑥 모양도 제각각 이었고,
벌레먹은밤도 꽤 섞여 있던 , 그러나 쩌서 먹을때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정말 꿀맛인 밤이었다. 어릴때 그렇게 맛나게 먹었을 라나.. 정말 오랫만에 먹어보니
맛있는 밤....밤을 정말좋아하는 딸아이와 '맛있네'를 연발하며 배부르게
까먹었다. 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들녀석까지 합세해서.
두번째의 '아주 특별한 밤'을 먹고는 올해는 뜻밖의 맛난 밤을 먹은
기쁨을 누렸다 생각했다. 그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정말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가 세번째의 밤을 토요일 저녁 들고왔다. 얼마 남지 않은 밤을
어렵게 따느라 팔엔 밤송이에 찔린 상처를 안고. 기쁘게 웃으며 '형수님이랑
애들이 밤을 좋아한다고 해서 누가 달라는 것도 뿌리치고 가져왔어요'했다.
그 마음 그렇게 받아도 되는 것인지, 눈시울이 붉어져 오고 말았다.
그것은 그냥 밤이 아니었다. 아, 누가 그렇게 순수하고 그렇게 따듯한 마음을
보여줄 것인가, 내 혈육 아니고서...
그가 가져온 올망졸망하고 매끈매끈하고 오동통한 밤을 얼른 펼쳐서
그중 제일 큰걸로 하나 골랐다. 면도칼로 곱게 곱게 깎아서 그에게 건넸다.
'참 맛있어요'하면서 짓는 그이의 미소가 싱그러웠다.
오늘,그가 가져온 '아주 특별한 밤'을 쪄서 동네뒷산에 올랐다.
음료수 하나 놓고, 야트막한 뒷산 가운데에 있는 쉼터에서 밤을 까먹었다.
역시 최고였다. 그 작고 오동통한 열매가 주는 고소함과 정겨움이라니...
벤치 앞에 군데군데 밤나무가 보였다. 밤송이를 다 내어준 고마운 밤나무..
오늘은 별로 비싸지 않은 남방셔츠 두개를 준비했다.
자주색,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엷은회색으로...
그의 '아주 특별한 밤'에 비하면 정말 작은 마음이지만
그이에게 우리가족의 마음 한조각 전하고 싶었다.
올 가을, 잦은 비에 모진 태풍에도 꿋꿋하게 일어서 열매를
맺은 귀한 밤. 그 귀한밤으로 해서 올 가을 정말
풍성한 느낌으로 가득한 날이었다고 얘기해 주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