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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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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훈장.


BY 빨강머리앤 2003-10-05

가을 초입에 지리하게도 내린 비에 덴 탓인지 오늘처럼 맑고 환한 날은

마치 자연의 선물을 받은것 같아 행복해 진다.

자연이 밝고 환한 선물을 주시는데 냉큼 받아야지 싶어 아이들을 대동하고

밖으로 나선 시각이 거의 열두시가 되어 있었다.

난  그게 문제다. 어디든 나서겠다 하면 얼른 준비하고 나서서 제대로

둘러 봐야 하는데 일요일이라고 늦잠도 자고 모닝커피도 마시고

커피마시면서 책도 한번 들춰 보다가 그만 아까운 시간들을 훌쩍 넘기곤 하는것이다.

오늘도 예외없이 내 패턴 대로 움직이다 시간이 열두시가 가까워 오는걸

보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길을 나섰다.순전히 늦은건 나 때문인데도

 애궂은 아이들만 닥달하구서 말이다.

 

오늘은 나도 아이들 처럼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여행을 해보야겠단 야무진 결심을

하고 자전거를 오랫만에 꺼냈다.

무에 그리 바빴던지 자전거 탈시간도 없이 몇주일을 보낸 동안

자전거 보관소에서 찬바람도 맞고 찬비도 맞은 자전거는 여기저기 흉하게

녹이 슬어 있었다.

게으른 주인을 만나 오랫동안 방치해둔 자전거가 미안하여 한번 다독여

주고는 자전거 페달을 돌렸다.

아직은 초보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엄마가 자전거 타는 모습이 영 불안해

보이는지 이모저모 코치를 해주려 애쓴다.

주로 아파트 단지에서만 연습했던 내게 익숙한 아스팔트 길은 정말 달릴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길이 울퉁불퉁해지고, 경사면이 심해지면 나도 모르게 어어, 소리가

신음처럼 새어나오게 된다. 그럴때 마다 무슨일인가 싶어 저만치 앞서가던

아이들이 뒤돌아 오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거리에 나서보니 우리나라의 도로가 자전거를 타기에 얼마나

환경이 열악한지  절감하게 되었다.

우선은, 제대로된 자전거 도로가 정비되어 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은 산야지대를 깍아 만든 아파트 단지이기 때문에 사방이 경사면 이어서

자전거 도사라도 주의를 요하는 지형이다.

하물며 자전거 초보운전자인 나 임에랴!!

또 횡단보도앞 길과 인도 사이의 문턱이 없어야 하는데

문턱을 없앤 곳도 많아지긴 했지만 아직까진 그렇지 못한 곳이 더 많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유모차를 끄는 아이엄마와 휠체어를 타야하는

장애인들에겐 더욱 난감한 문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곳곳에 포진한 그런 어려운 난관들을 하나씩 뚫고 그거도 아니면

자전거를 내려 끌고 가면서 산과 들이 어우러진 농촌길로 접어들었다.

집에서 불과 이십여분 떨어졌을까 싶은 곳에 그렇게 한가로운 전원풍경이

펼쳐져 있음은 분명 행운일 것이었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쪽의 토양이 잣나무의 생장에 좋은지

잣나무가 유난히 많다. 소나무와 어울린 잣나무 군락이 여전히 진녹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낙엽송이 무리지어 서있는  산중턱은 벌써 부터 단풍을

이루고 있어서 한껏 가을의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다.

그 산아래 황금빛 물결로 출렁이는 농가를 끼고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들국화도 지천이었다.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이곳저곳에서

연보랏빛 웃음을 흘리며 한들거렸다. 하얀구절초가 듬성듬성, 노란산국은 어쩌다

마주치고 억새풀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는 길이 이어졌다.

자전거 속도에만 관심을 보이던 아이들도 그런 가을의 모습들을 차마

외면할수 없었던지 한마디씩 보태곤 했다.

'와, 들국화가 엄청 예쁘다.'

'보세요, 저기 풀잎에 고추잠자리가 쉬고 있어요.' 아이들은 상쾌한 가을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가을로 접어드는 자연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들레 진달래가 지천이던 봄날엔 걸어서 다녀봤던 그길을

자전거를 타고 가을을 달려 보았다.

 

지난 봄의 일인데 아이들이 그 길들을 기억하고 있어서 놀라웠다.

'엄마, 약수터 까지만 가 보자' 그랬다. 그길 끄트머리 즈음에

약수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의 그 말을 듣고나서야 생각해 냈다.

 

누군가가 설치해 놓은 도롱이를 통해 졸졸 흐르는 약숫물에

입을 대고 받아 마셨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살갗을 식혀주고

찬약숫물이 가슴속 까지 시원하게 해주었다.

찔레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그 사이로 산국이 노랗게 피어있어서

어쩐지 그냥 돌아서고 싶지가 않았다.

약수터를 돌아 숲으로 난 길을 걸어 가 보았다.

억새풀이 한들거리고 길가에 핀 쑥부쟁이보다 더 환한 색깔을

가진 쑥부쟁이들이 가을산을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잣열매 하나 쯤 발견할수 있을까 싶어 앞으로 몇발짝을 움직이자

꽃한송이가 발길을 붙잡았다.

'산부추꽃'이었다. 그 함초롬이 이쁜모습,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미덕을 겸비한

그래서 어쩐지 청초한 느낌마저 풍기던 한송이 산부추꽃을 거기서 발견했다.

와,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꽃에 눈을 맞추니 앞서가던 아이도

처음 보는 진홍빛 꽃송이에 앞에 발길을 멈추었다.

꼭 한송이였다. 산속에 홀로 핀 진홍빛 이거나 보랏빛으로 곱던 산부추꽃.

차마 두고 오고 싶지 않은 산부추꽃 한송이가 마음속에 담아서 산길을

내려왔다.

 

우연히 발견하게된 산부추꽃으로 해서 가슴 가득 맑간 기쁨이

샘솟는듯 했다. 약수터를 돌아 다시 돌아나오는 길,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내리막길을 힘차게 내려왔다.

내리막길을 거의다 내려와 커브를 돌때였을 것이다.

오늘 하루 자전거 여행을 아주 잘했다 싶었는데 커브길에 있는 돌멩이를 피하지

못하고 자전거랑 함께 기우뚱 넘어져 버렸다. 내딴에는 다른데 안다칠 요량으로

손을 땅에 집었는데 손바닥이 할라당 벗겨져 버렸다.

스멀스멀 피가 나오기 시작하자 나보다 아이들이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근데 정작나는 오른손바닥이 벗겨져 피가 나는 것보다 왼쪽 엄지손가락의 통증으로

얼굴이 찌뿌려져 왔다. 손가락을 접지른 모양이었다. '난 아직 멀었구나,,'싶은 생각.

손이 얼얼하구나. 그간에 게으름을 피우고 연습을 하지 않은 때문이지 싶어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다행히 집에 다와서 그리 되었기에 근처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 간단히

치료를 할수가 있었다.

아직은 살갗이 벗겨져 나간 오른손 손바닥이 화끈거리고 아프고

접지른 손가락도 욱신욱신 쑤시는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이제까지 할수 있었던 한계를 한껏 벗어나

꽤 멀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작은 가을여행' 다녀온 특별한 날이기도 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의 하얗고 보라색 꽃에 마음을 다 주고

산부추꽃의 그 함초롬한 아름다움에 나머지 마음까지 다 나눠주었던

햇살고운 가을날이었다. 손바닥에 손가락에 비록 '위대한 훈장' 하나씩을

새기고야 말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