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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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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음식을 먹던날.


BY 빨강머리앤 2003-09-28

오늘은 낮에 생전 처음으로 방글라데시 음식을 먹어 보게

되었다. 낯선  그 음식에선 진한 향신료 냄새가 풍겨와 먹기도

전부터 속이 울렁 거려왔다.

카레가 섞여있는 밥도 손이 가지 않았고, 일부러 우리먹으라고

내놓은 소갈비요리며 생선조림과 야채 볶음도 손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얼굴은 웃음을 띄우고... 정말 그에게 실망을

주기 싫었다. 그 요리를 만들기 위해 두군데나 들러서 장을 보고

아침을 먹자 마자 11시경 부터 2시까지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지 했는데 내속이 그것들을 거부하니

내 얼굴 표정을 관리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다.

아이들은 아예 안먹을 태세였다. 밥은  거들떠도 안보고 과일만 집어 먹고 있었다.

눈을 꼭 감고 마음을 잡고,, 이것도 경험이다 생각하자고 수저를

들었다. 진한 향신료 냄새가 속을 더욱 울렁거리게 했지만

그래도 웃으며 밥을 떠넣자 그가 웃으며 만족해 한다.

그래도 입맛에 조금 맞는 생선조림을 얹어 겨우 밥을 먹고 났더니

생선조림이 그렇게 맛있냐며 조금 싸주겠단다.

우리는 방글라데시 뉴스가 방송되는 텔레비젼 앞에 앉아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이다.

남편을 '형님'이라고,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우리 부부를

따르는 그는 오년째 한국에서 외국인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한국에서의 오년째인 그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하고 한국의 문화를

많이 이해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또한 갖고 있는

스물여덟의 방글라데시 청년이다.

그런 그가 꼭 한번 자기 사는 곳을 보여 주고 싶으니

와 달라고 오늘 우리를 초대한 것이다.

 

방글라데시에서 대학교육을 받았으나 적당한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다 빚을 얻어 한국에 일하러 왔다고 했다.

처음 몇년은 최저생계비 수준의 돈을 받고 일을 했으며

오년이 지난 지금 겨우 빚을 갚고 이제야 돈을 모을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아시아 최빈국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는 일자리가 없어

노는 청년들이 넘쳐나고 그들은 하나같이 아시아의 두마리 용,

일본과 한국에 취업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그가 버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을

책임질 요량으로 라도 그는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가 요즘 실의에 빠져있다.

 

얼마전 국회에서 통과된 '고용허가제' 때문이다.

국내 취업 3년 미만인 사람만 정식으로 노동자로 인정을 해주고

그 이상은 출국조처를 감행한 고용허가제 때문이다.

좀체 흩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가 술에 취해서

형님과 형수님을 붙들고 한국에서 더 일하고 싶다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묻고는 했었다.

내가 무슨 좋은 방법이 있을 턱이 없어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줄 뿐,

어떤 해답을 해줄수가 없어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 보여 주고는 했었다.

 

언제나 월급을 받으면 자신의 월급의 80%를 부모님께 보내는

효자 아들이었다. 나머지 20%는 주로 음식재료를 사는데 쓰는 그가

가끔씩 시내를 나올때마다 음료수며 과일을 들고 오곤 했었다.

귀에 닿을락, 말락한 미소까지 실어와 그를 볼때마다

나빴던 기분까지 좋아질 정도였는데

이젠 그는 잘 웃지 않는다.

 

나라법을 내가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지만,

'외국인 노동자 고용안정제'는 대통령이 공약한 사항이었다.

그들 외국인은 대통령의 그 말한마디에

모든 시름을 놓고 그저 열심히 일만 하면 되겠다 생각했다고 했다.

참 착한 사람이다. 아니 순박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고 내가 아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줄 뿐인데

늘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려고 애쓰는 그들을 보면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다.

순박한 성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만나다 보면 예전

인정이 살아있던 우리의 농촌마을 사람들을 만나는것 같은 느낌이 든다.

 

3D업종은 어느땐가 부터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기피업종이 되었고,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사업주들이 고민끝에 대량으로 몰려오는 외국인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환경호르몬, 인체유해물질을 다루는 ,소위 3D업종에

골고루 포진되어 우리가 기피한 어렵고도 힘든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지금이야 몇년전에 비하면 그나마 복지수준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콘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면서 여름엔 더운대로,

겨울엔 추운대로 그저 그곳에서 계속해서 일할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언제 이민국에서 나와 자신을 잡아갈지 모를 상황에서

고용주는 그걸 이용해 일주일은 낮근무를 했고, 일주일은 야간근무를

한 규칙대신, 이젠 야간에만 일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래도 괜찮다고 웃는 그의 얼굴이 천진했다.

동생을 우리나라에 데려오기 위해 얼마동안 애를 썼던 그가

결국엔 브로커한테 돈만 뜯기고 출국을 위해 임시로 머물던 태국에서

동생이 다시 방글라데시에 돌아갔다며 속상해 하던 그였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때, 우리말 모른다고 상습적으로 폭행하던 한국사람들이

지금은 때리지 않아서 괜찮다고 그래도 한국이 좋다는 그였다.

그에게온 시련은 사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일상적인 고통이라

한다. 들어보면 구구절절 소설로 써도 될 그런 사연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그들.

 

그저 그들의 그런 얘기를 들어줄수 밖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나와 남편은 오늘 그가 정성들여 만들어준 그의 나라 음식을 먹으며

그의 시름에 잠시 고개를 끄덕여 주다 돌아왔다.

 

형수님이 생선요리를 아주 잘 먹어서 기분이 좋다며

밝게 웃는 스물여덟살의 방글라데시 청년이 맘놓고

우리땅에서 일하고 돌아갈수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저,그런 바램을

가져 보는 걸로 그의 아픔에 동참할수 밖에 없으니 마음이 아프다.

그의 콘테이너 박스 뒤쪽, 벼가 익어가는 논배미에 고추잠자리떼가 머물렀다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일제히 날아올랐다.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른 하늘은 파랗게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