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낳고서 시작했다는 엄마의 광주리장수는 그 뒤 아들을 낳아 대학을 졸업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
농사 일이 시작되기 전 이른 봄에는 들나물 산나물을 뜯어다 팔았다.
농사 일이 시작되면 오전에는 밭 일을 하고 그 사이 장에 내갈 물건을 골랐다.
가지, 고추, 오이, 열무, 상추, 깻잎, 고구맛대, 머윗대...돈이 될만한 것은 무엇이든 좋았다.
아버지가 산지기를 하니 산에 딸린 밭이 많아 시장에 내갈 채소는 언제나 넘치게 있었다.
점심을 먹고 손질해서 단으로 묶을 것은 묶고 광주리에 담아 시오리 떨어진 시장으로 갔다.
주부들이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올 시간이었다.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를 면장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외할아버지가 면장을 한 적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외할아버지 키가 겨우 난장이를 면할 만큼 작다는 뜻이었다.
어려서부터 친한 친구였다더니 다 늙어 돌아가실 때까지 짖궂게 놀린 것이다.
엄마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작았다.
내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키 순으로 번호를 정했는데, 우리엄마 키 정도면 당연 1번이었다.
그렇게 조그만 여자가 무거운 광주리를 이고 한 여름에 시오리 길을 걸어 다녔다.
엄마랑 같이 광주리 장사를 다니던 동네 아낙들이 있었다.
광주리 장사에 나선 아낙들은 잠시 쉬어가는 장소가 있었다.
서로 광주리를 내려주기도 이어주기도 하면서 모두들 엄마 광주리 무게에 혀를 내둘렀다.
제일 키 작은 여자 광주리가 무겁기로는 일등이었던 것이다.
그 무게를 어찌 이고 다닐 수 있는지 놀랍고 이해가 안된다고들 하였다.
날마다 시장에 내갈 채소가 있는 집은 산밭이 많은 우리 뿐이었다.
다른 아낙들은 팔 것이 있을 때, 가끔씩 가는 시장을 엄마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시내버스가 생기고 난 후에는 가끔 시내버스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광주리 차비를 따로내라는 버스차장도 있었다고 하였다.
광주리 차비를 받고라도 태워주면 좋은데, 어느 때는 태워주지도 않았단다.
무거운 채소광주리를 보고는, 차문을 거칠게 닫고 오라잇하면서 버스를 출발시킨다 하였다.
그 때는 버스 안에 쓰리꾼이라 불리는 소매치기도 흔할 때였다.
시내버스를 탔다가 채소장사해서 번 돈을 몽땅 소매치기 당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무거운 채소광주리를 이고 시내버스를 타는 것보다는 걸어 다닐 때가 더 많았다.
버스차비 5원도 아깝고, 차장에게 당하는 설움도 싫고, 소매치기 당하는 것은 더더욱 싫어서였다.
엄마가 가끔 하던 말대로, 모래밭에 혀를 박고 죽어도 그런 꼴은 볼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내가 버스정류장까지 대신 광주리를 이고 간 적이 있다.
광주리 무게는 상상을 초월했다.
무게에 눌려 자라목이 되는 것이야 그렇다치고 가슴이 벌어질 듯 통증이 왔다.
다리가 후둘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를 걸어 다닌 우리 엄마는 초인이었던가...
가끔, 그렇게까지 우리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을 갖는다.
너무도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고맙기보다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그까짓 학교가 뭐라고, 안 다닌 사람도 하하호호 웃으면 살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