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뜰에 박태기 나무 세 그루가 있다.
모두 씨앗으로 길러 낸 것들이다.
묘목을 사다 키운 나무와 씨앗으로 길러낸 나무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낳아 기른 자식과 데려다 기른 자식의 차이와 같다고나 할까.
박태기 나무를 바라보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고향집 우물가에 박태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밥풀꽃 혹은 밥티꽃이라 부르던 기억이 난다.
꽃모양이 밥풀을 닮았다고 그리 불렀다.
남편의 해외근무를 따라 워싱턴에 갔더니 박태기 나무가 지천이었다.
봄이면 숲속이 온통 분홍빛으로 변해서 진달래 피던 고향 생각이 났다.
박태기 나무가 무리지어 꽃이 피면 저렇게 이쁘구나, 알았다.
내가 사는 텍사스는 들꽃은 많아도 꽃피는 나무는 많지 않다.
들꽃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무리지어 꽃피는 나무의 화려함을 당할 수는 없다.
텍사스에 살면서 그 점이 못내 아쉬웠다.
박태기 나무는 텍사스에서 자라는 몇 안되는 꽃피는 나무다.
꽃에 미쳐 살아보기로 했으니 몇 그루 사다 심었다.
물도 주고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죽어버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박태기 나무 성질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잔뿌리가 적고 길고 굵은 원뿌리가 깊이 박혀 옮겨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그 대신 뿌리가 깊이 뻗으니 가뭄에 강하다고 하였다.
그런 거였어, 그럼 씨를 구해서 심어봐야지.
산책 길에 박태기 나무 씨를 받아다 뿌렸다.
수 백 개를 뿌렸는데 겨우 몇 개 싹이 텄다.
뿌리가 깊이 내리기 전 상하지 않게 얼른 옮겨심어 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러 낸 박태기 나무가 내 키의 두 배도 훌쩍 넘게 자랐다.
이젠 분홍색 밥풀꽃이 봄마다 필 것이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밥풀꽃 나무를 상상하니 봄이 아니어도 행복하다.
뜰에서 자라는 꽃과 나무가, 낳아 기른 자식 같기도, 오랜 친구 같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 중에, 그냥 스쳐가기도, 가족이나 친구가 되어 살기도 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 수많은 꽃과 나무가 있지만 내 뜰에서 자라는 것은 그래서 특별히 소중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행복해지기도 한다.
내 뜰에서 자라주는 꽃과 나무가 이쁘고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