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보 같이 세상을 살다 간 엄마를 좋아하지 않아, 아버지가 더 좋아.
이제껏 그렇게 말을 해왔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행복한데 엄마를 추억하면 안타깝고 미안하고 답답하고 슬펴서였다.
그런데 요즘은 아버지보다 엄마 생각에 잠길 때가 더 많다.
딸인 내가 추억하기 마저 싫어하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슬플까, 그런 생각도 든다.
떠오르는 대로 엄마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악을 쓰며 엄마에게 대들었다.
"엄마는 작은엄마가 내게 어떻게 한 줄 알기는 알아?"
작은엄마와 우리 엄마는 동갑내기 아들과 딸을 서로 바꾸어 맡았다.
작은집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동갑이던 사촌은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시골에 남았다.
60년 대 말이니 먹고 살기 힘들어 시골 사람들이 서울로 서울로 몰려 갈 때였다.
작은집도 살기 힘들어 고모네가 사는 서울로 이사하기로 하였다.
등록금이 없어 다니던 중학교를 그만 둔 나도 작은집을 따라 서울로 갔다.
양장점에 취직하고 싶다고 내가 졸라서 그렇게 되었다.
시골에 살 때도 작은엄마는 우리 엄마의 딸 키우는 방법을 못마땅해 하곤 하였다.
가시내들을 그리 공주처럼 떠 받들어 키워 어찌 시집을 보내느냐는 것이었다.
작은엄마가 그리 말하면 엄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남의 집 아들보다 귀한 딸들이란 말은 작은엄마가 없을 때나 혼자서 궁시렁궁시렁 했다.
결혼하고 십 일 년 동안 자식을 못 낳는다고 온갖 설움을 당하다 뒤 늦게 낳았기 때문이다.
작은엄마는 큰집 딸 학교 보낼 돈이 있으면 자기네 아들 학비를 도와줘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큰집이든 작은집이든 딸은 쓰잘 데 없고 아들만 중요하다고 하였다.
작은엄마는 큰집 딸인 우리들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도 망설임이 없었다.
공주처럼 키운 막내딸을 그런 작은엄마에게 맡기는 우리 엄마 심정이 어땠을까.
작은엄마 눈에 나는 버르장머리 없고 게으르고 눈치도 없는 가시내였다.
그것을 제대로 잡으려니 잔소리와 구박은 당연했다.
그 때까지 엄마가 해주던 빨래를 작은엄마는 날더러 직접하라고 하였다.
언니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것은 아마 처음으로 직접한 빨래였을 것이다.
조금은 서러웠다.
밥상에서 김치찌게로 내 손이 자주 가면 작은엄마는 김치찌게를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가시내가 무슨 고추장을 그리 좋아하느냐고, 고추장 먹는 것도 눈치를 주었다.
많이 서러웠다.
작은엄마는 고모에게도 불평을 늘어놓았나 보다.
고모가 날 더러 작은집에서 나와 고모집에서 살라고 하였다.
고모가 소개한 서울 총각과 데이트를 하던 언니가 서울에 왔다.
나는 그 때 작은집과 고모집을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었다.
고모집보다는 그래도 시골에서 같은 동네 살던 작은집이 더 가깝게 느껴져서였다.
작은엄마는 언니를 붙들고 큰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자기는 내 꼴을 보기 싫으니 언니가 시골 갈 때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큰 소리로 화를 내며 하는 말이었으니 내 귀에 다 들렸다.
작은엄마가 그렇게 말을 했어도 언니는 혼자서 시골로 내려갔다.
많이많이 서러웠다.
몰래 언니 뒤를 영등포 역까지 따라 걸어가며 가출을 꿈꾸기도 하였다.
가출까지는 용기가 없었고, 그 날 후로 나는 단식을 했다.
시골로 다시 가고 싶으니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사흘을 굶고, 시골로 보내주겠다는 작은 아버지 허락이 떨어졌다.
작은 엄마와 우리 엄마가 아들과 딸을 바꾸어 맡은 지 겨우 네 달이 지나서였다.
집에 돌아 와, 우리 엄마와 작은엄마가 절로 비교되었다.
빨래야 당연히 우리 엄마가 해주었다.
엄마는 먹을 것도 우리보다는 사촌이 먼저였다.
그 때는 남자를 우대하던 세상이었으니, 그것까지는 나도 이해한다.
작은엄마 아들은 성질마저 그닥 곱지 않았다.
형이랍시고 툭하면 세 살 어린 남동생을 못살게 굴었다.
태권도 도장에 다니며 배운 실력으로 남동생에게 발길질도 서슴치 않았다.
그런 경우에도 우리 엄마는 사촌 편이었다.
내가 엄마에게 대들던 날도, 엄마는 사촌 편을 들어 남동생을 야단쳤다.
이것을 보던 내가, 악을 쓰며 엄마에게 덤비다 엉엉 울기까지 했다.
'세 살이나 어린 남동생과 사촌이 싸우면 누가 손해냐,
잘못한 사촌을 놔 두고 어찌 억울한 동생을 야단치냐, 엄마는 바보냐...
작은 엄마가 날 어떻게 구박했는지 알기는 하냐...'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후 사촌은 내 눈치가 보였는지, 남동생을 괴롭힌 기억이 별로 없다.
우리 엄마는 그런 일이 있었거나 말거나 여전히 사촌에게 좋은 큰엄마였다.
사촌은 다니던 학교를 무사히 졸업한 후 서울로 갔다.
나는 엄마가 바보 같아 싫었다.
어찌 내 자식이 아니고 남의 자식 편을 든단 말인가.
누가 봐도 잘 잘못이 뻔히 보이는데, 우리 엄마에겐 보이지 않는 것인가.
작은 엄마에 대한 섭섭함을 엄마는 죽을 때까지 입에 올린 적이 없다.
만나면 여전히 다정하고 살가운 동서 사이였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살다 간 엄마가 이해된다.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들 고모들에게 대접 받고 산 것이 울엄마 덕인 것도 알겠다.
우리들 또한 친척들 사이에 대접 받고 산 것이 다 울엄마 덕이었음도 알겠다.
엄마의 헌신과 희생이 아니었더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가능했을까...
엄마를 바보 같다던 내가, 우리 엄마는 남이 못 보는 것을 보는 지혜가 있었다고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