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덕분에 이 주 동안 휴가를 얻었다.
뜰에 나가 느긋한 맘으로 여기저기 살피고 다닌다.
씨가 떨어져 자란 무궁화 몇 그루가 눈에 띈다.
활짝 핀 무궁화를 보고 부러워하며 이름을 묻던 이웃 생각이 났다.
그 집에 가면 이쁨 받을 텐데 씨가 떨어져 자란 무궁화가 우리집 뜰에선 불청객이다.
화분에 옮겨 두었다 그 여자를 만나면 주어야겠다.
무궁화를 화분에 옮겨 심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건강하다 해도 육십 후반에 들어 선 내게는 힘겨운 일 중 하나다.
낫으로 잘라내는 것이 훨씬 쉬운 처리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어려운 방법을 택하려 할까.
그 여자가 이쁘다고 부러워하던 생각이 나서다.
우리는 이웃에 살지만 피부 색깔도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다른 이방인이다.
그 여자 남편과 우리 남편이 사소하지만 불편한 일도 있었다.
우리집 꽃을 퍼가겠다고 그 남편이 왔더란다.
우리 남편이 못 퍼가게 했으니 서로 주고 받는 언사가 고왔을 리 없다.
두 남자 모두 고운 말 사용하는 교양을 갖추지 못해 일어 난 사고였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거나 말았거나 그 여자는 나를 보면 여전히 반갑게 인사를 한다.
물론 나도 반갑게 화답한다.
가끔은 짧은 수다를 주고 받기도 한다.
이웃으로 살아도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는 많지 않다.
통성명을 하고 지내는 사이도 많지 않다.
거기에 날씨나 꽃에 관한 이야기라도 수다를 떠는 사이는 흔치 않다.
십 년 넘게 반갑게 인사하고 수다도 떠는 그 여자는 그래서 귀한 이웃이다.
조깅을 좋아하는 그 여자와 꽃밭에 나가 사는 나는 자주 만나는 사이라 할 수도 있다.
아버지는 팔남매 맏이, 엄마는 칠남매 맏이여서 내겐 사촌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소식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만난다 해도 서먹할 것만 같다.
이웃 사촌이라더니 이제는 그 여자가 사촌들 보다 더 친근하다는 생각도 든다.
피부 색깔이나 언어가 달라도 이웃에 살면 사촌보다 가까워 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힘들어도 무궁화를 화분에 옮겨심어 그 여자에게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