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내 핸드폰 메모장 8번 내용이다.
언제 입력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메모장에 고이 입력된 것으로 보아 어딘가에서 내 관심을 끌만한 글로 소개된 책인 것이 분명하다.
(후에 기억났는데 한비야 님의 ‘그것은 사랑이었네`에 이 책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다행히 내가 즐겨 찾는 도서관에 이 책이 있었다.
도서관에 비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책은 아주 깨끗하다.
어쩌면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손때가 덜 묻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깨끗한 책은 기분을 좋게 한다.
우선 겉지를 앞뒤로 훑어보았다.
느낌이 괜찮다.
두께도 얇고 글씨크기도 적당해서 쉽게 읽힐 것 같았다.
내용 또한 편지 글이어서 예상대로 나는 시간 품을 별로 들이지 않고도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실제로 주고받은 편지 글이 전부이다.
게다가 어떤 깊은 사연이 오고 간 것이 아니라 서적 주문과 그에 대한 답변의 글이 대부분이어서 상당히 사무적인 성격의 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편지가 거듭되면서 당사자들 사이에 쌓이는 신뢰와 호의 등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편지의 주인공은 뉴욕에 사는 가난한 여류 극작가 헬렌 한프와 영국의 중고서적 판매점 직원인 프랭크 도엘이다.
편지가 오고 간 기간은 헬렌이 이 서점에 중고서적을 주문한 1949년부터 프랭크 도엘이 세상을 떠난 1969년까지의 20년 세월이다.
중간 중간 다른 직원들이나 프랭크 가족의 편지글도 양념처럼 끼어있어 색다른 분위기도 맛볼 수 있다.
당시 전후의 영국은 물자가 매우 귀한 시기였다.
미국의 헬렌은 중고서적을 주문하고 구입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쌓이자 영국의 서점 직원들에게 감사의 의미로 달걀이나 햄, 통조림, 고기 등 귀한 음식들을 자주 선물하게 된다.
계속되는 헬렌의 뜻밖의 선물에 서점 직원들과 가족들은 깊은 감사의 마음과 따뜻한 정을 갖게 된다.
그들은 답례할 기회라도 갖기 위해 헬렌이 영국을 방문해 주기를 간청한다.
하지만 가난한 헬렌은 경비조달의 어려움으로 번번이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결국 그들의 인연은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프랭크 도엘의 죽음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사실 재미로 말하자면 그리 높은 평점을 주긴 어려울 것 같다.
편지글이라고 해도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있다면 그나마 흥미진진할 텐데 이 편지들은 앞서 말한 것처럼 책의 주문과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싱겁고 심심한 책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명이었던 헬렌 한프는 이 책을 출판한 뒤 유명해졌다.
뿐만 아니라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연극으로도 올려지고 1987년에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큰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담백한 책이 그처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
과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매력은 이야기의 힘이 아닌, 소박한 정의 발견이었다.
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 그저 잔잔하게 오고 가는 사람들의 향내가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나만의 감동이 아니었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느끼고 생각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그 또한 나에겐 감동이었다.
비슷한 생각과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위로가 된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어떻게 이런 우정이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서로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완전한 타인 관계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족이나 친지, 친구 등 나와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연에게는 크게 감동받기 어렵다.
더 소중한 것을 주고 더 많이 주어도 당연하게 여기거나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에게 별로 바랄 것이 없는 타인의 호의는 작은 것일지라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을 생각해보게 된다.
크든 작든 사랑을 나누면 세상은 따뜻해질 수밖에 없다.
꼭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좋을 것이다.
다정한 인사도 좋고 밝은 미소도 좋다. 온라인상에서의 선플도 좋다.
사랑 담긴 것이라면 아끼지 말고 나누면 좋겠다.
그것에 목마르고 배고픈 이들이 많을 것 같다. 당장 나부터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 돌아서는데 누군가 다시 저 책을 읽게 되겠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 헬렌 때문이다.
책 속에 있는 헬렌이 내게 해 준 말이 있었다.
제 책이 마음에 드신다면 앞으로는 이렇게 빌리지 마시고 꼭 구입해서 간직해주세요.
그리고 깨끗한 책보다는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책을 더 사랑해주세요.
책 어느 귀퉁이에 깨알 같은 글씨가 남겨져 있거나 어느 글귀에 반듯하게 밑줄이라도 그어져 있다면 절 보듯 반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