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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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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BY 선물 2010-08-07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랬다.

 

아직 어린 계집아이라 부를 수도 있을 여중생시절.

자나 깨나 같은 옷을 입었던 내게 잘 때만 입으라는 잠옷이 생겼다.

적당히 유치하고 적당히 촌스러운 진분홍색 잠옷이었다.

나는 그 옷을 입고 공주가 된 양 얼마나 설렌 맘으로 잠자리에 들었던지.

공주라면 의당 있어야 할 침대도 없었지만 잠옷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공주처럼 살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내방(동생과 함께 썼으니 우리 방이겠지.)으로 들어왔다.

들어와서 바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잠옷이 마치 신분상승의 열쇠라도 되는 양 나는 달뜬 마음이 되었다.

보는 이 없어도 혼자 도도해졌다.

인정하는 이 하나 없었지만 나는 기꺼이 고결한 소녀가 되었다.

물론 첫 며칠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슬금슬금 평민의 자리로 원위치하고 있었다.

잠옷 갈아입기가 번거롭게 느껴지더니 결국엔 입던 옷 그대로 잠자리에서 뒹굴거나 아니면 일어난 뒤에도 계속 잠옷을 입고 생활하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잠옷과 잠옷 아닌 옷과의 경계는 그렇게 모호해졌다.

그래도 잠옷을 입고 이부자리를 파고들던 저녁이면 다른 날보다는 조금 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었다.

잠옷을 입는 순간, 나는 하루가 전과 후로 확실히 나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경계의 중심에는 가 있었다.

전의 시간에는 나의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갖지 않고 지냈다.

하지만, 후의 시간은 달랐다.

잠옷을 입은 후의 시간은 온전한 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때는 하루 중 저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시간이었다.

잠옷은 저녁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저녁이면 그랬다.

뭔지 모를 해방감, 자유로움 같은 것이 긴장을 풀어주며 모든 의미의 구속으로부터 나를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행복했다. 공주처럼 우아하게 행복했다.

 

잠옷은 단지 상징이다.

잠옷이든 평상복이든 어차피 저녁은 열린다.

하지만, 공주의 저녁을 펼쳐주는 아이콘은 잠옷이다.

 

사실 공주의 저녁은 그리 흔한 편이 아니었다.

독재자인 오빠나 다른 가족의 부르심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일손을 도와야 하는 쇤네의 저녁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저녁은 싫었다.

너무 싫었다.

진짜 싫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만의 시간을 방해받는다는 것은 투덜거리며 씨부렁대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을 걸쭉한 스트레스였다.

 

아침부터 저녁의 어느 선까지는 쇤네라도 무방했지만 그 후에는 반드시 공주의 시간이어야 했다.

그 생각은 아가씨가 되고 새댁이 되고 엄마가 되고 아줌마가 되어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언제부턴가 공주의 저녁은 물 건너 살랑살랑 약 올리듯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 라고 할 수 있는 선이 있을 수 없는 쇤네만의 저녁이었다.

도대체 나를 그냥 내버려두질 않았다.

아내며 며느리며 엄마인 내게 공주의 우아한 저녁시간이란 참으로 요원한 것이 되고 말았다.

언제 다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되찾기나 할 수 있는 건지.

뭉게뭉게 가슴.

그러면서 퍼뜩 드는 생각.

나는 도대체 왜 해지고 어둑어둑한 저녁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을까.

선물처럼 주어지는 새 날, 새 아침이 아닌, 하루의 명이 얼마 남지 않은 저물녘의 시간대를 그처럼 사랑하게 되었을까.

 

힘들여 하루를 살아야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뭔가를 기대할 수 있고 가능성이 있고 즐길 수 있는 햇님의 시간이 아닌 하루의 소멸을 눈앞에 둔 하필 그 시간을 왜?

그것도 젊다는 표현도 억울할 어린 소녀 때부터 줄곧.

애늙은이였던 것일까.

고개가 가로 흔들린다.

단지 어떤 일면에서 그런 성향이 나타났으리라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런 성향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내게서 또 나타난다.

 

희한하게도 나는 꽤 젊었다 할 수 있을 나이의 어느 순간부터 얼른 늙기를 소망해 왔다.

하루의 저녁을 사랑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의미에서 나는 노년을 소망했다.

소녀가 다른 생기발랄한 시간들을 다 제쳐두고 저녁시간의 행복을 일찌감치 깨우쳤던 것처럼 젊은 날의 나는 대개의 로망인 <하루라도 젊음>은 차치해두고 노년에 대한 무한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또한 지금 이 시점까지 여전히 유효하다.

 

내게 묻고 싶다.

왜, 왜, 왜애애애.

 

그것은,

공주의 시간.

나의 시간.

나만의,, 온전한,,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고귀한 시간.

어쩌면 그것이 나의 절박한 왜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될 것 같다.

다 내려놓고 여기까지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그 시간에 대한 간절함 때문이다.

젊음이 부러웠던 적이 언제였던가.

너무 멀면 부러움도 없다.

대개는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는 그것에 부러워하고 목매는 법이다.

젊어도 그리 젊지 못했던 나는 일찍부터 늙음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제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나 노년은 저녁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저녁은 수없이 온다.

오늘 공주의 저녁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고 희망도 있다.

그러나 인생의 노년은 단한번이다. 그리고 단호하다.

고단하거나 평안하거나 ,

더러는 평안한 날도 더러는 고단한 날도 있겠지만 그런 더러 더러가 아닌 대체적인 삶은 한가지로 규정지어진다.

 

그렇게 규정될 나의 노년은.

내가 갖게 될 인생의 저녁인 노년은 반드시 평안의 저녁, 공주의 저녁이어야 한다.

내 삶은,

왠지 그것을 갖기 위해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인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위로 받을 길이 없다.

적어도 인간의 영역에서는.

 

그것을 넘어선 차원의 영역.

신의 영역, 절대자의 영역.

그곳에는 이미 보험을 들어 둔 사람이다.

(결코 속되지 않은 행위에 대한 매우 속된 비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의 차원에서 절박하다.

지금껏 살아온 보폭이라면 내 걸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생의 저녁에 닿게 할 것이다.

그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서글프지 않으나 그곳에 희망이 없다면 몹시 서글프고 허무할 것 같다.

 

언제나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를 붙잡고 사는 나.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불투명한 미래.

 

그래서 나는 잠옷을 준비해야 한다.

무슨 색의, 어떤 모양의 잠옷이 나를 공주의 잠자리로 인도할지를 치열하게 궁리할 때다.

게으름 부리다가는 끝내 쇤네의 저녁을 맞게 될지도 모르니까.

 

<최근의 저녁은 싫다. 잔인하다. 너무 더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