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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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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 이야기- 수술이 싫은 특별한 이유


BY 선물 2010-07-30

침대를 높이고 기대앉아 그냥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어느 정도 초점이 풀려 있었을 것이다. 그런 흐릿한 시야로 무척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병실로 들어선다. 넋 놓고 앉아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며 등을 곧추 세웠다. 반가운 친구였다. 그런데 친구는 심하게 울상이 되어 있다. 그 얼굴에 내가 더 긴장된다. 거의 울상이 다 된 친구는 어느새 입까지 씰룩거리며 내 옆에 와서 앉는다.

“야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니가 왜 여기 있어. 어디가 어떻게 아파? 응!”

친구의 음성은 젖은 걸레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리 심각하지도 않은 일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민망하기만 하다.

“아니, 별 것 아니야. 그냥 난소에 종양이 발견되어서 제거했을 뿐이야. 그리고 악성도 아니고 양성이라 아무렇지도 않아. 니가 그러니 내가 오히려 쑥스럽기만 하다. 얘.”

“그런데 왜 이 병원에 있어?”

그제야 동그랗던 친구의 눈이 기름하니 제 자리를 찾으며 긴장이 풀린다.

“아니, 주위 사람들이 암센타에 가서 수술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조직검사까지 해 주기 때문에 훨씬 정확하다고 해서······. 그나저나 그거 때문에 그렇게 놀랐구나. 괜히 미안해지네.”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수술을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알릴 일이 아니라 생각해서 친구도 나의 입원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엉뚱한 경로로 친구는 내 입원사실을 알게 되고 말았다. 내가 입원한 병원이 암센타이다 보니 말기 암 환자들이 많이 입원해 있어 호스피스들의 봉사활동도 그만큼 활발한 편이다. 내가 있던 병실에도 말기 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친구가 다니는 성당에서 봉사활동 나온 호스피스 분이 우리 병실에 들렀다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친구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얼마 전 폐암으로 돌아가셨고 그 분도 이 병원에 계셨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는 더욱 놀란 가슴이 되어 내 소식을 접하자마자 종종걸음 치며 달려온 것이다.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오히려 친구가 내게 고맙다고 말한다. 나쁜 결과가 아니라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여 하는 말이 이왕 입원한 김에 쉰다고 생각하고 오래 입원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픽하니 웃었다.

하긴 입원이라는 것을 한번쯤 꼭 해보고 싶었다.

아주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입원생활을 상상하면서.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를 낳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남의 손에 밥 얻어먹은 경우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다보니 그렇게 때때로 꾀가 날 때가 생겼다.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별로 잘해 드린 것도 없고 이렇다 할 만큼 크게 고생한 것도 없건만 그래도 나는 늘 고단하고 지쳤다. 아, 며칠만이라도 내 살림일랑 깡그리 잊고 남의 손으로 지은 따순 밥 먹으며 포시랍게 지내 봤으면 싶었다. 여행을 가도 집을 생각하면 마음 무거울 것이고 그래도 입원쯤은 해야 좀 맘 편하게 쉴 수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입원을 하면 하얀 시트 위에 누워서 진종일 잠만 자야지 생각했다. 혹시라도 눈이 떠지면 읽고 싶었던 책이나 물리도록 읽어야지 그런 생각도 했다. 입원은 그런 면에서 얼마  간의 천국여행이 되리라 상상했었다.

그러나 그 꿈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날은 다인 실이 없어 1인실로 입원했는데 수술 준비를 하는 절차가 꽤 번거롭고 몸도 고달팠다. 계속 주사를 맞아야 해서 주사바늘 꽂을 혈관을 찾는 순간에는 아픔의 강도가 너무나 심해 어른 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눈물을 쏟고 말았다. 2명의 간호사가 번갈아 찾는데 4번 만에 성공할 만큼 내 혈관은 약해져 있었다. 2번 째 꽂은 자리는 너무도 심하게 부어  오르고 통증이 지독해서 계속 얼음찜질을 했음에도 멍과 아픔이 보름을 넘어서까지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아픔이 수술 과정 중에서 가장 큰 아픔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몸이 아픈 것과는 다른 고통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할 때 속옷을 모두 벗고 환자복만 입고 있으란 지시를 받았을 때 내 머리 속은 몹시도 복잡해졌다. 마흔을 넘은 몸뚱이 무에 그리 호들갑스럽게 경계하느냐고 하면 하나도 할 말이 없지만 실은 내 몸살이 누군가에게 그대로 보여진다는 그 자체가 부끄럽고 민망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산부인과 진료 시 가랑이 벌리고 눕는 순간의 치욕감 이상이었다. 아무리 싫다고 해도 꼭 치러야  순간은 꼭 오고야 만다. 수술대 위에 눕혀진 나는 간호사가 내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계속 그것만 걱정했다. 곧 나를 홀라당 벗길 것인데 이 노릇을 어떡하나 하는······.

그러나······.

‘곧 벗기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수술이 끝났다고 한다.

마취는 정말 신기했다. 그 시간만큼은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 내 몸뚱어리만 존재했을 뿐 내 마음, 생각, 정신 이런 영역에서의 나는 깡그리 죽어있는 시간이었다.

실은 그것이 다행이었다.

수치심을 굳이 날 것으로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난소 양 쪽에 종양이 있어 둘 다 떼어 냈습니다. 정확한 조직검사는 얼마 후에 나오겠지만 우선 악성은 확실히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난소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수술이 잘 끝났습니다. ”

비몽사몽간에 의사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다 잘 된 거로군. 그 생각을 하며 다시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이제 수술은 끝났고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꿈같은 입원 생활만 즐기면 될 일이었다. 수술 끝나고 2박 3일, 처음에는 그렇게 짧은 시간만 내게 주어졌을 뿐이라 생각했다.

남편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다 주러 가느라 잠시 자리를 지웠을 때 간호사가 들어왔다.

다인 실에 자리가 났는데 옮길 것인지를 물어 보았다.

하루 15만원 병실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나는 바로 옮긴다는 대답을 했다. 나중에 남편이 와서 병실을 옮길 때 왼 쪽 수술 자리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과 함께 나를 기다리는 5인실로 내 몸은 침대에 눕혀진 채 옮겨졌다. 그 곳에는 갖가지 사연을 안고 있는 환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6년 8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