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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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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이야기- 한번쯤 유서를 써보세요.


BY 선물 2010-07-30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이 참 무섭다. 그런 이유로 참게 되는 말도 많은 편이다. 어쩌다 실수로 내뱉은 말이 알게 모르게 어떤 불행을 암시하는 듯 느껴질 때면 어떤 식으로든 좋게 해석하며 불안감을 떨쳐야 직성이 풀린다.

이번 여름에 수술로 입원할 일이 생겼을 때도 그랬다.

크게 심각하지 않은 수술이긴 했지만 전신마취를 해야 했기에 겁이 많은 나는 묘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간혹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는데 나도 그러면 어쩌나 자꾸 요망스런 마음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수술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저명인사들이 자신의 죽음을 가정하고 미리 써둔 유서에 대한 내용이었다.

꽤 많은 이들의 유서내용이 소개되었고 나름대로 많은 감동을 받았던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서도 기억나는 것은 단 한통의 유서일 뿐이었다.

어떤 여류 명사가 남편에게 남기려고 쓴 것인데 자신이 죽으면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보자 정말 현실적이구나 하는 생각보다는 참 신선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더 멋있고 그럴듯한 내용으로 작성할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을 치장하지 않는 참으로 세속적인 내용을 남기려 한 것이다.

때론 부인과 사별한 노인들이 유산을 바라고 접근하는 젊은 여인들에게 빠져 자식들 나 몰라라 하고 재산을 여자에게 야금야금 갖다 바치는 경우를 주위에서 보게 될 경우가 있다. 물론 정말 나이를 초월한 사랑으로 결합하여 서로 아끼며 살아가는데도 그런 억울한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큰 재산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이 한평생 알뜰살뜰 살며 모은 재산을 남편이 다른 여인에게 준다고 생각하면 어머니란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맘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말이 씨가 되어 죽기라도 할까봐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마취에서 너무도 잘 깨어났고 약간의 문제가 있긴 했지만 수술 자체는 아주 잘 끝났다. 맨날 못살겠다, 힘들다 하면서도 막상 죽음은 두려웠나보다. 


남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사실 또 있었다. 만에 하나 내가 못 깨어나면 아이들 외가와 계속 좋은 관계 맺게 해 달라는 부탁도 하고 싶었고 끝으로 근사하게 당신을 사랑하며 살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도 멋있게 남기고 싶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서도 남기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너무 맘이 아팠다.

아직 철이 들지 못한 아이들. 더 성숙할 때까진 절대적으로 내가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 생각이고 사실 아이들이 힘들긴 하겠지만 엄마가 생각한 만큼 그렇게까지 낭패를 겪는 일은 드물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런저런 걱정은 아이들에게 많은 말을 남기게 할 것이다.

엄마 없더라도 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바르게 자라고 건강하고 등등 참으로 많은 부탁과 소망을 남기고 싶었다. 또 하나 정말 남기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으며 생각이상으로 나를 힘들게 해서 나도 때론 아이 맘에 상처가 될만한 말을 날카롭게 내뱉곤 했는데 그것이 맘에 너무나 걸렸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희로 인해 엄마가 힘든 시간들이 물론 많긴 했지만 실은 너희로 인해 행복했던 시간들이 훨씬 많았고 너희들과의 그런 인연에 참으로 감사한다는 말을 남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내 진심이다.

하지만, 그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음은 알 수 없는 시간에 불쑥 찾아오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다는 맘에 나는 강해졌다.

실제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죽음을 바로 앞에 둔 이들을 보며 느낀 점이 병이 들더라도 아이들 자기 앞가림할 정도로 키워 놓은 뒤가 되어야지 하는 것이었다.

젊어 죽음을 앞둔 이는 정말 한이 많을 것 같았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이제 내 인생 살만하다 싶어지니 죽을병이 들었다며 억울해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들 둔 엄마에 비하면 차라리 감사한 일일 것 같았다.

나도 그리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쪼록 아이들에게 할 몫은 다 할 수 있는 정도의 복은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6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