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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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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BY 선물 2009-07-15

저녁 식사 후, 하루의 일과가 대충 끝나면 남편은 막둥이의 목줄을 맨다. 막둥이는 기분이 좋아지면 꼬리를 살랑거리는데 이때가 되면 살랑 정도를 넘어 펄럭거리는 깃발처럼 힘찬 움직임을 보인다. 막둥이와 달리 나는 억지로 끌려 나가는 입장인지라 대충 흐느적거리며 신발을 신는다. 바야흐로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산보시간이 된 것이다.

심신이 약해진 남편에겐 큰 위로가 되는 호수공원 산책시간이기에 최근에는 나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건강을 생각하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면 대략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적지 않은 시간이지만 지루하거나 힘들다고 느껴질 때는 별로 없다.

오히려 워낙 어느 한곳 빠짐없이 아름다운 공원인지라 매일 보는 풍경임에도 새롭게 감탄하고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다.

아파트를 나서면서 남편과 나는 바로 묵주 기도를 시작하는데 40분쯤 지나 노래하는 분수대 앞에 이를 즈음이면 5단이 끝난다.

막둥이는 중간 중간 마킹(영역표시)하느라 정신이 없다. 정해진 몇 곳만 마킹을 허락하는데 이놈이 점점 욕심이 과해져서 단속하느라 애 먹는다. 그래도 남편은 나보다 그런 인심이 후한 편이다.

기도가 끝나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최근에는 남편과 속엣 말을 많이 나누었다.

사실 남편은 마음을 표현하는데 대단히 인색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최근 급변하고 있다.

조용조용 내게 건네는 이야기 중에 뜻밖의 마음을 전한다.

-예전에는 정말 이런 생각 해 본 적도 없었는데 요즘은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어. 여러 생각들이 오가지만 결론은 이런 거야. 후세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만약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면 그때도 난 당신을 택할 거야. 당신이 참 고마워.

언젠가 나도 한번 가정해 보았던 일,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그냥 우와 근사한 걸, 하는 정도로 감탄했겠지만 내 경우는 여러 가지 감회가 일어났다. 그동안 내가 이 사람으로 인해 아팠던 것들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상당 부분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고맙고 기쁘기만 했을 것인데 내겐 아픔이 먼저 느껴졌다.

남편은 최근 우울증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인 것은 본인이 먼저 힘든 감정 상태를 느끼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이다. 심한 가슴 답답증과 공황장애를 자각하고 혼자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남편 정도의 우울증은 많은 이들이 경험했을 것이다.

까짓 거 병원치료 따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혼자 이겨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정말 심각한 경우는 진료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과 벽을 쌓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빠져드는 경우일 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용기를 내어준 남편이 고마웠다.

약을 처방 받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남편의 경우는 오히려 신앙의 힘이 훨씬 큰 도움을 준 듯하다.

우울증이란 것이 단박에 낫기는 힘들겠지만 우리는 호전되고 있다고 믿으려 한다.

그럼에도 걱정되는 것은 주위 상황이 이 사람을 최대한 안정시킬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점이다.

조심한다고 해도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여전히 발생하는 법이다.

그런 것들이 예전에는 그저 속상해하기만 하고 지나갔을 텐데 지금의 남편에게는 훨씬 큰 강도의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 특히 아내인 나는 매 순간 긴장해야 한다. 웬만한 일은 혼자 감당해내야 한다. 나또한 그런 시간들이 벅차지 않겠는가.

그 과정에서 남편은 내게 최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좀 더 단단히 단련되어서 든든한 가장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 탓인지 여전히 유리처럼 아슬아슬하고 약해 보이기만 하다. 그래선지 나는 지금 전적으로 남편의 편이 되어 있다. 남편 지키미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아이들이 멋모르고 저지르는 잘못을 보며 나는 아이들을 미워하게 된다.

부모님들이 별 의미 없이 하시는 말씀 하나에도 혹시 남편이 다칠까 봐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남편을 웃게 하는 막둥이만이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 다른 이들에겐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이 사람이 고백하는 사랑조차 편치 못한 것이다.

남편에 대한 나의 이런 감정 상태는 또 무엇일까.

사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남편이 내게 예전에 보이지 않던 지극한 관심과 애정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내 작은 부주의로 남편의 맘을 다치게 했을 때 불쑥 짜증을 부릴 때도 더러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사건 당시 그와 관련된 어떤 보도도 보지 못하게 하고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추격자란 영화가 재미있다고 해서 같이 보자고 권했다가 왜 그런 영화 보게 만들었냐며 너무도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원망해서 몹시 당황하기도 했다.

다만, 그럴 때도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미안하다는 표현을 했다.

그동안의 남편은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어쨌든 그 후로는 슬픈 이야기, 잔인한 이야기, 남 잘못된 이야기 등은 일체 꺼내질 않는다.

남의 일조차도 좋지 않은 일은 내 것인 양 감정 상태를 겪는다는 데야 어찌 조심하지 않겠는가.

 

나는 살아오면서 남편의 눈물을 꽤 여러 차례 본 편이다.

물론 혼자 흘리는 눈물이지만 나는 눈치 채고 있었다.

호수 공원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이다.

남편이 젊은 날 즐겼던 노래가 들려오면 콧날이 시큰해지는 모양이다.

그럴 때면 나는 가만히 손을 잡아준다거나 아니면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 주기도 한다.

그런데 또 대책없이 남편을 울리는 노래가 생겼다.

이상하게 호수공원에서는 그 노래가 자주 들린다.

오늘 가사를 검색해 보았더니 추가열의 <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라는 노래였다.

남편 없이 이 노래를 혼자 듣고 있는데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린다.

우리, 언제 정말 개운하게 웃을 수 있을까.

그래도 탁구를 같이 칠 때는 내 하는 양을 보면서 꽤 자주 웃던데....

좀 힘들더라도 산보며, 탁구며 이 사람이 좋아라 하는 것은 이 한 몸 아낌없이 바쳐 희생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