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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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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하나


BY 선물 2008-10-15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남자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 속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에 실린 글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결혼이란 건 상대와 적어도 사계절을 두 번은 겪고 할 일이다.

우리 부부는 거의 첫 눈에 호감을 느끼고 만난 지 2주 만에 시부모님 모실 수 있느냐는 말로 프러포즈를 받고 바보처럼 고개 끄덕이는 것으로 결혼을 결정했다.

그리고 만난 지 2개월 만에 약혼을 하고 약혼 후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그 5개월 동안 몽롱할 정도의 달뜬 사랑도 느꼈고 거의 파혼 직전까지 갈 정도의 삐걱거림도 있었지만 운명이었던지 부부의 인연은 맺어졌다.

우리는 겨우 여름 한철만 제대로 함께 했을 뿐이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언제나 무겁게 느껴지는 질문이다.

 

결혼 1년 후의 나였다면 단호하게 절대 아님이라 했을 것이다.

4녀1남 귀하게만 자라난 남편은 지독히 자기중심적, 자기 가족 중심적인 사람이었고 나는 존중받는 아내가 아닌, 절대복종해야 하는 피지배자의 신분이었다.

일단 훤칠한 키에 귀공자 타입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고 여타 조건들도 걸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정성을 쏟으며 마음을 얻고자 했던 기간의 만남만으로 사람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고비를 만나 제대로 극복하지도 못하고 한창 상처로 아플 때는 이미 코앞에 결혼식이 다가와 있었다.

신혼은 당연히 불행했다.

아이를 낳으면 달라지리라 생각했지만 남편은 아이로 인해 변하진 않았다.

그 때 헤어짐의 문턱까지 갔지만 우린 어렵사리 다시 부부의 연을 이어갔다.

 

결혼 10년 후의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아마 망설이기만 할 뿐,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을 것 같다.

남편은 그때 잘 나가는 회사를 그만 두고 자기 사업을 하느라 고군분투 할 때였다. 세상을 만만하게 보던 사람이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할 때였다.

내게는 서슬 퍼렇게 날을 세우던 성격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이 감지될 때였다.

이 사람 어쩌면 변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불쑥불쑥 헤어짐을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지배적인 심정은 이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혼 20년을 1년 앞둔 지금 나는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남편은 작아지고 또 작아졌다. 뜻대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몹시 힘들어 보인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커지고 세졌다.

남편은 안간힘을 쓰며 현실을 인정하려 하고 있다.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다. 그러면서 우울해지고 어두워지고 위축되었다.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 고요한 공간을 찾아 깊이 숨어드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나도 힘들고 한없이 버겁고 울적한데 남편에게 드리워진 어둠의 무게 앞에선 표현할 수가 없다. 시시할망정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내서 해주고 기운 없어진 손이라도 많이 잡으려 애쓰고 혼자이고 싶어 할 때 방해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런데도 남편을 웃게 하는 데는 역부족이다.

 

남편은 이제 내 앞에서도 작아지려 한다. 아무 것도 간섭하고 싶어 하질 않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남편이 작아지면 나는 커질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작아진 남편 앞에서 나는 더 작아져야 했다.

서슬 퍼렇게 나를 짓누르던 남편을 보는 것은 두려움이었으나 작아진 남편을 보는 것은 아픔이다. 슬픔이다.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한가지로 아픈 고통이다.

 

지금 헤어짐에 대한 생각은 해서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는 좁아진 남편의 등을 보며 오히려 깊은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다시 그 질문을 생각한다.

다시 태어난다면.

 

내게 행복을 주지 못하는 남편. 남편보다 내가 더 좋아해서 맺은 부부의 인연.

남편을 돌아본다.

 

남편은 한결같이 내 몸을 아껴주었다.

무거운 것은 절대 못 들게 하고 내가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살짝 문닫아주고 아이들 조용히 시킬 줄 아는 사람이다.

어디를 가도 나와 함께 가기를 원하고 항상 내가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사람이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서 뭘 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했다.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보낼 줄 모르는 가정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나를 숨 막히게 할 만큼 철저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외출 한번 마음 놓고 하지 못했다.

남편의 이성으로는 아내인 나를 편하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노력하는 모습도 보인다.

다만, 그게 생각처럼 되질 않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구속하는 것이다.

어쩌면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를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님과 남편의 벽에 갇혀 있다. 어쩌면 강제가 아닌, 평화를 위해 스스로 갇혀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얼마나 간절히 갈망했던가.

그래서 안타까울 뿐, 그 사람의 노력을 알고 있기에 남편을 미워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남편과 상관없이 자유 아닌 구속에 이미 내가 길들여져 있다.

 

그래, 사람은 변하더라.

남편은 지금 작고 외롭다.

하긴,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시도 있지.

너도 외롭냐, 나도 외롭다. 남편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어쨌든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나의 남편에 대한 감정은 더 끈끈해질 것이다.

서로의 존재 자체가 위로의 힘이 되어줄 시간이 저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다시 한 번 태어난다면 하는 질문 앞에선 솔직히 나 조금 맹랑해지고 싶다.

 

눈두덩이 두꺼워도, 큰 콧구멍 벌름거려도, 두툼한 입술 미련스러워 보여도 그저 나만 보면 만사가 좋아 힘이 나는 사람.

나만 보면 절로 기운이 넘쳐흐르는 사람.

투박한 손으로 열심히 몸을 부려서 나를 먹이고 입히고 따뜻하게 재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소박한 아내가 되어 아기처럼 투정부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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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밀 하나!

그런 사람으로 지금의 남편이 변해서 태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