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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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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끝)


BY 선물 2006-07-12

 

개는 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고독을 지킨다.

일간신문에 나오는 소설에서 본 글입니다.

강아지를 키우다보니 그 말이 명언이다 생각됩니다.

마음이 불편해서 혼자 삭히고자 할 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막둥이의 까만 눈동자는 제게 위로가 됩니다.

그럴 때 막둥이를 껴안습니다.

막둥이를 만질 때 느낌을 표현하라면 몽글몽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몽글몽글한 생명체의 따스함은, 그리고 아무런 말없이 자신의 몸을 그대로 제게 맡기는 모습은 정말 고마울 만큼 사랑스럽습니다.

저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구슬 같은 눈은 마치 제 맘을 다 알겠다는 듯 때론 깊어 보입니다.

사실 강아지가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그저 자기의 본능에 정직하게 살아갈 뿐이겠지요.

그런데도 전 막둥이에게서 많은 것들을 읽습니다.

말하지 않는 막둥이지만 전 듣습니다.

결국은 막둥이에게 제 감정을 이입해서 제 마음의 목소리를 듣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언제나 막둥이는 제 맘을 다 아는 친구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기억이 또 있습니다.

제 아이들이 태어나서 말도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할, 갓 난 아기 때였습니다.

마음이 고단한 때, 아기를 바라보면 얼마나 큰 위로를 받는지요.

아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제게 맡기지요.

그런데 전 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기에게 제 맘을 다 의지했습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아기의 눈동자에서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그것이 오히려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신비롭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을 하나씩 배워간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신비를 하나씩 잃어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막둥이도 조금씩 나름대로의 세상을 익혀가면서 영악해지기도 할 테지요.

그러면서 제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도 보일 거예요.

하지만, 그때는 또 다른 사랑의 영역인 깊은 정이 그 자리를 대신 메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제 앞에 나타난 이 생명체의 존재가 점점 감사해집니다.

사실 이번 막둥이 시리즈는 정말 오랜만에 올렸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마지막 회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우리 막둥이 사진을 함께 올리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컴퓨터에 워낙 약하다보니 기술이 받쳐주질 않네요.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은 포기하고 이렇게 글만 올립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막둥이,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각시님 싸이에 가서 자로란 이름의 귀여운 강아지를 보았습니다.

우리 막둥이를 꼭 닮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신나게 디카로 막둥이를 찍었습니다.

그런데 울 막둥이 사진발이 참 안 받는 얼굴인지 실물처럼 사랑스럽게 찍히질 않습니다.

아무리 해도 자로처럼 예쁘게 찍히질 않네요.

또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게 되는 18층 강아지(개)가 있습니다.

막둥이와 같은 말티즈입니다.

그 강아지의 주인 여자 분도 참 젊고 예쁘게 생겼는데 강아지도 귀티가 나고 참 잘났습니다.

그 분도 처음에는 저보다 강아지를 더 싫어해서 6개월을 가둬 키웠다고 합니다.

지금은 2년이 넘게 키우고 있는 중인데 너무 이뻐서 자식보다 더 사랑스럽다고 합니다.

때문에 예전 강아지 때 가둬 키운 것이 몹시도 마음에 걸리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말도 하네요.

우리 막둥이 그렇게 보면 주인 잘 만난 편인 것 같기도 하구요.

여하튼 그 강아지도 냉정한 눈으로 평가하자면 우리 막둥이보다 눈도 크고 더 잘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객관적 시각이란 것이 막둥이에겐 필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제겐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강아지입니다.

어린 왕자가 그랬지요.

자기별에서 만난 콧대 높은 장미가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지구에 와서 보니 너무도 흔하게 존재하더라구요.

그러나 금세 깨달았지요.

왕자의 장미랑 지구의 장미가 생긴 것은 똑같을지 모르지만, 아니 지구의 장미가 더 예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길들여진 장미는 그 콧대 높은 장미뿐이란 것을....

그래서 별에 두고 온 장미를 몹시도 보고  싶어 했지요. 


막둥이도 제겐 그런 의미입니다.


막둥인 가끔 혼자 베란다 너머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사람도 개도 뒷모습은 슬퍼집니다.

비록 강아지이긴 하지만 가끔은 너무 어린 때에 엄마를 떠나 온 막둥이가 안쓰럽습니다.

그럴 땐 제가 안아줍니다. 그러면 요놈은 폭 안깁니다.

막둥이를 위로해 주려고 안아주었지만 실상 위로는 또 제가 받네요.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자신의 몸을 제게 온전히 맡겨주는 데에 대한 희열이 느껴집니다.


성장하는 자식을 키우며 쓸쓸해지는 경우가 때때로 있는데 이제 더 이상 제 품속의 존재가 아니란 것을 느낄 때입니다.

다시는, 아마 다시는 엄마 품을 전부로 알던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지금까지 제 품을 전부로 안다면 더 큰 문제이겠지만 그래도 쓸쓸한 건 쓸쓸한 겁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을 준다면 자식과도 얼마나 좋은 관계가 될까요.

얼마나 행복한 관계가 될까요?

그러나 자식에겐 아무리 애를 써도 기대가 생기고 욕심이 생기고 그래서 아픔이 생깁니다.


길을 걷다 가끔 떠돌이 개를 만나게 되는데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집니다.

강아지를 찾습니다. 라는 광고를 접하면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동물은 주는 만큼 사랑을 돌려줍니다.

아주 정직하게요.


그동안 밋밋했던 막둥이 글을 읽어주셨던 분들께 막둥이와 함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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